그룹명/깔크막의 숲 산행 이야기

수양산 가는 길(593.9m)09.05.02

깔크막 2009. 5. 5. 17:44

가는 길이 아름다워 해찰하고 싶은 산.

물소리 바람소리 들으며

고개를 삐쭉여도 얼른 가라고

등 밀지 않는 산

들머리가 물소리로 장관인 산

바위와 물의 조화속에

이름모를 풀들이 길가에 서서

환호성으로 우리를 멈추게 하는 산

노루귀 바디나물 반디지치가

서로 먼저라며 모델되어 서고

개별꽃이 꽃술을 흔들며

갈색 흰색 노란색의 어울림으로

작은 바람에도 춤을 추는산

바람꽃이 꿩의다리가

깽깽이풀이 밭을 이루고

우산나물과 하늘말나리가 행여

비 맞을까봐 하늘을 가려주고

큰꽃으아리가 하얗게 웃고 있는 산

야생화의 군무를 보는 듯

가슴은 뛰고 다리는 풀리고

그리움과 반가움에 눈물을 흘리고

인적없는 오소리길에서

사람을 못 만나 외로운 시골의 노인처럼

연신 허리를 굽히며

헤벌쭉 웃으며 슬금슬금 다가오는 산

둥글레가 푸르스름하게 등불을 밝히면

애기나리는 고개숙여 살포시 웃고

백선은 향기를 진하게 뿌리는 산

층층나무 처럼 솟아오르려는 마들이

진갈색 어린 티를 버리지 못하고

닿을 듯 말 듯 손을 밸밸꼬며 허공을 잡는 산

점심을 먹을려고 첫술을 고스레 하며

사방을 둘러보면 휘이 둘러보면

참취가 솜나물이 백선이 덜꿩나무가

우리를 꼬옥 안아 주는 산

이름을 불러주기도 힘든 란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한참을 일어나지 못한 산.

국수나무와 괴불나무가 있는 숲에서

맛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게 하는 산

비를 부르던 바람과 구름이 머리를 덮고

후두둑 연두색 참나무 잎에 구르는 산

배낭을 짊어지고 산불초소에

몸을 숨기니 사람냄새가 가득한 산

비와 바람에 쫓겨 풀 식구에게

인사도 못하고 임도로 내리게 한 산

우중에도  애기꽃이 제비꽃들이 두릅이

또 오라며 손사래 저어주는 산

보고만 있어도 울음이 절로 나오는 산

자연의 소중함을 더 깊이 알게 해 준 산

자연은 자연속에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산

그리움처럼 수양산이 또 보고 싶어 질 때

항상 그대로 그 자리에 있기를 갈구하는 산

가을에 또 오겠다며 모자를 눌러쓰고

솔 숲을 지나 바위계곡을 지나

길가에 내려 서도 옷자락을 붙잡는 산

아!.아 !. 수양산

 

 

**수양산(m) 가는 길은 만덕산(萬德山 575m) 가는 길과 같고 산행의

시작도 같은 곳에서 하는데, 광주에서 창평가는 길 60번을 타고

옥과방향으로 가다보면 대덕면 소재지 들입에 곡성가는 길이 이정표와

함께 몽한각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보이는 곳에서 우회전하여 직진하면

오른쪽에 운암저수지가 있고 하운마을을 지나 만덕사를 지나 상운마을을

지나면 왼편에 산행로를 알리는 표지판과 이동식 화장실이 보이고

주차장이 있다.

산행의 거리가 짧아서 왕복 2시간이면 충분하고 누구나 산책 하듯

오를 수 있는 산으로 임도를 따라 산행을 하면 시간은 늘릴 수가 있다.

운암마을에서 만덕산을 거쳐 수양산까지 한꺼번에 산행을 할 수가

있으나 들머리와 날머리가 달라 차량으로 이동해야 한다.

하운마을--만덕산--수양산--국수봉--월봉산--하운마을(5시간)코스도있다.

 

**진정으로 숲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둘러두고

보겠다는 사람들만 들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내것처럼 아니 자연을 내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가서는 안되는

산으로 산행은 평이하고 정상부는 산불초소가 덩그러니 지키고 있으며

사방은 나무로 가려 전혀 볼 수가 없어 매우 답답한 산이다. 

 

**대덕면의 (지역의 유래는 본 블러그 "만덕산 할미봉가는 길" 참조할 것)

 

미암사당 은 정면 3칸 측면 1칸 앞쪽에 퇴를 두었고 조선시대 1579년에

초창되었으며 지방민속자료 36호이며 사유재산으로 대덕면 장산리에

위치하고 2001년에 민속자료로 지정되었으며 미암 유희춘(1513~1577)

선생의 사당이며, 자는 인중 호는 미암 또는 연계라고 한다.

본관은 선산이며 순천에서 해남으로 이거한 유계린(柳桂麟)의 차남으로

금남 최부(錦南 崔溥, 1454∼1504)의 외손이다.
1537년(중종 6)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다음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 예문관 검열, 홍문관 수찬, 무장현감 등을 지내다가

을사사화때 파직되었다.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함경도

종성으로 이배되어 19년의 유배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1567년 유배에서 돌아와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미암사는 임란 이전에 지어진 호남 최고(最古)의 건축물로서 정면 외벽

문틀 상단에 그려져 있는 3개소의 벽화와 건물내부의 벽화는 미술사적으로

그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외부의 벽화는 왼쪽부터 백학도. 등룡도, 봉황도로 그려져 있으며,

백학도는 미암의 고고한 절의를 나타내고 있으며, 등룡도는 마침내 뜻을 얻어

현관으로 등용되는 화려한 관도를 상징하며, 봉황도는 일가의 화려한

출세도를 상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흙벽 위에 흙회로 단장한 후 색채로 그렸으나 바깥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오른쪽의 봉황도는 일부가 떨어져 나가 있다.

사찰의 외벽벽화는 많이 있으나 유교적 건축물인 사당에 벽화가 그려져

있기는 매우 드문 사례로 작품성보다는 희귀성이나 상징미가 돋보여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미암일기 (眉岩日記, 木板包含) 는 보물 260호로 모두 11책으로 되었으며

소유는 선산 유씨 문중이고, 조선시대 1567년~1577년까지의 일기이다.

 

상월정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미암일기는 조선 선조(宣祖)때의 학자인

미암 유희춘(眉岩 柳希春, 1513∼1577)의 친필일기이다.

지금 남아있는 일기는 선조 즉위년(卽位年, 1567) 정묘(丁卯) 10월 1일부터

시작해서 선조10년(1577) 5월 13일까지 대략 11년간의 일기인데 중간에

몇 군데 빠진 데가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 개인의 일기 중 가장 양이 많은 것이며 동시에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도 크다.

일기에 본인의 일상생활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상세히 적었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조선초,중기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본인이 중앙의 요직에 있었던 만큼 선조 초년에 조정에서 일어난

사건은 물론 경외(京外)의 각 관서의 기능과 관리들의 내면생활 및

사회, 경제, 문화, 풍속 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편 임진왜란 때 선조25년 이전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다 타고 없어져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찬할 때 사료가 없었으므로

이 책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경연일기(經筵日記)』와 더불어

선조실록의 첫 10년의 사료가 된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일기초 중 제12책에는 부록으로 미암과 그 부인 송씨의

시문(詩文) 및 잡록(雜錄)도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판본을 포함하여 일괄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이 중 3매를

전남대박물관에서 일시 보관했다가 현재는 후손들의 보존각(모현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의 하나로

활자본 7책으로 인간(印刊)한 바 있으며 최근에 번역본이 간행되었다.

 

 

김선기 가옥(潭陽 金善基 家屋)

 담양 유종헌 가옥(潭陽 柳宗憲 家屋) 

 

이 가옥은 문화재 자료 제180호로 개인소유이며 조선후기의 건물로

대덕면 장산리에 있으며 선조36년(1603)경에 만덕 김대기(晩德 金大器,

김선기의 14대조)에 의해 처음 건립되었다고 하며, 순조25년(1825)

김현대씨에 의해 중수되었다.

가옥의 형태는 안채(정면 5칸, ㄷ자형), 사랑채(정면 4칸, 측면 2칸),

사당(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배치되었으며, 특히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결구나 치목기법이 특이한 건물이다.
안채는 정면5칸, 측면2칸의 ㄷ자형 평면을 하고 있다. 막돌 허튼층 쌓기의

높은 기단위에 덤벙 주춧돌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평면은 왼쪽부터

부엌, 골방, 큰방, 대청2칸, 작은방 2칸으로 배치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보아 총고가 낮고 고졸한 느낌이 든다.

사랑채인 망인당(望仁堂)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전퇴가 있으며, 팔작기와

지붕이며, 막돌 허튼층 쌓기의 높은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굵은

누하주(樓下柱)를 세워 전면이 마루로 된 당의 형식을 갖춘 건물이다.

누하주 위에는 대청의 우물마루에서 빼낸 부재가 결구되었고 그 결구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웠고 전면기둥 앞에는 계자난간이 설치되었고

풍혈(風穴)이 부분적으로 남아있다.(담양군청에서 발췌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