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태산 가는 길에 역사와 문화유적이 있다. (710m)
불태산 가는 길은 담양 대전면(13번도로)에서 장성 백양사 쪽으로(898번도로) 담양군과 장성군의 경계에서 병장산을 거쳐 불태산으로 가는 길이 있고 군계 못 미쳐 왼쪽의 대산농장에서 가는 길과 대야저수지 왼쪽의 광산김씨 평장공 사우가 있는 곳에서도 오를 수가 있다.
장성군 진원면 소재지(24번도로)에서 궁구저수지를 지나 진원성 입구에서 오르는 길과 진원리 고산서원과 새로 확장한 진원 저수지(?.) 위 쪽으로 옛날 군부대가 있었던 곳에서도 오르는 길이 있으며 장성 중앙초등학교 쪽과 유탕리와 서동마을에서 오르는 길이 있으며 학동에서도 오르는 길(진원리를 지나 고속도로 밑을 직진하면)이 있는 산으로 어느 곳으로 오르든지 쉽게 불태산을 쥐락펴락은 하지 못 할 정도의 수준을 갖고 있는 산이다.
불태산은 오랫동안 군부대가 있었던 관계로 출입이 통제되었던 곳으로 대체적으로 원시 자연의 모습이 오롯하게 보존되고 있는 곳으로 원래는 불대산이었으나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불태산이 되어버렸고 북쪽의 일원은 상수도보호지구로 보호되고 있어 물이 깨끗하고 무척 맑다.
남쪽 사면의 정상은 일망무제로 탁 트여 조망권이 매우 좋으며 발 밑은 천애절벽으로 아찔한 곳이 설악의 공룡능선처럼 이어지는 광주에서 가까운 산행지로는 최적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이다.
광주에서 산행을 한다면 대부분이 능선 위주로 불태산으로 올라야 하기 때문에 미리 식수를 준비해야하는 번거로움도 있지만 적절하게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산행을 함으로써 당뇨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나 고지혈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산행을 주기적으로 한다면 상당한 치료효과가 있을 법한 산이며, 자신의 체력에 맞추어 산행시간과 강도를 적절하게 조절 할 수가 있는 아주 매력적인 산이다.
반면 북쪽 사면은 울창하게 하늘을 찌르는 참나무 숲과 소나무 숲이 하늘을 가려 대낮에도 하늘을 볼 수가 없으며 그 속에서 주인 역할을 하는 산새들의 노래소리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와 바람소리가 묘하게 어울려 정신적인 압박감은 숲길을 걸은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세계로 빠져드는 무아의 세계가 펼쳐지고 만다.
병장산의 물과 불태산의 물을 모두 모아 유탕리 서동으로 흘려 보내며 길고 깊은 산자락을 부드럽게 펼쳐들면서 산을 더욱 깊게 하고 있고 굽어보면 야생화가 지천이고 올려보면 나무의 아름다움에 빠지고 발 밑을 조심하지 않으면 모나지는 않는 돌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사목의 시체들에 발이라도 걸려 넘어지기가 십상이나 가다가 쉬어가라는 듯이 너럭바위들이 사방에 포진하고 있어 숲 길의 매력이 100% 발휘되는 산이다.
옛날에 나옹선사가 담양과 나옹암을 오갈 때는 아마도 이 길을 가면서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말없이 살라하네 푸르른 저 산들은 티 없이 살라하네""을 읊고 지나갔을 것 같은 길이 1시간 정도 계속되는 동안에 감탄하기를 수없이 반복하고 만다.
한재골의 대산농장을 출발하여 본격적인 불태산 산행이 시작되는 시점에 때죽나무의 인사를 받으며 안부를 넘어 병장산의 모퉁이를 돌아 서동마을로 내린 다음에 나옹암터를 지나 한재골로 내려서는 길을 선택하고 나 홀로 뚜벅뚜벅 해찰하면서 소나무 숲이 울창한 곳을 지나고 제철을 맞아 흐드러지게 핀 골무꽃 꿀풀 엉겅퀴의 자태를 감상하면서 아직 피지는 못했지만 꽃봉오리를 실하게 주렁주렁 달고 있는 솔나물의 군락지를 지나면서 쥐똥나무의 꽃과 보잘 것은 없지만 국수나무꽃도 굽어다 보면서 울창한 참나무 숲에 들어서니 이름을 알 수 없는 버섯들과 새들이 나의 출현을 반가워하지 않고 한바탕 대소란이 일어난 것을 보니 이 근처에 새들의 둥지가 있는 것 같다.
사람주나무의 꽃도 어쩌다 핀 고욤나무의 꽃도 까치박달의 꽃도 숲의 주인공으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모습에서 그냥 나는 이 숲길이 좋아 바람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고 지나가려고 하는데 사방에서 경계심과 조바심으로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과 그 소리 자체도 너무나 아름다워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들어도 누구의 소리인지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옆에서 푸드득하는 소리에 오히려 내가 놀랐는데 산벗나무의 몸통에 난 가지를 바탕으로 이름도 모를 산새가 집을 짓고 열심히 포란을하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이미 새 생명이 탄생하여 있었고 아직 깨어 나오지 못한 알이 한 개가 들어 있었는데 아마 어미새는 엄청 망설이다 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마지못해 위협을 느껴서인지 날아서 옆가지에 앉으며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는 것이 꽤나 많이 놀랜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지나가고 있었을 뿐인데 아마 처음으로 새끼를 키우는 초보 엄마로써 집을 짓기에 좋다는 장점만 보고 집을 지었는데 하필이면 숲길에 바짝 붙어 있는 산벗나무를 고른 것 같았다.
나로써는 처음 가는 길이고 길 마져 희미하였으나 숲길이 워낙 아름답고 볼거리가 많아 해찰을 하면서 마음껏 숲의 맛을 마시면서 병장산의 모퉁이를 돌다보니 얼마 전에 병장산을 거쳐 불태산을 간다는 것이 그만 그 긴 병장산 자락을 밟고 엉뚱한 장성댐 아랫마을까지 내려갔다가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원점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면서 산 속의 숲길은 예측 할 수가 없는 곳으로 내려서는 경우가 허다하였고 사전에 조사를 하지 않고 무턱대고 야생화에 취해서 가다보면 참으로 난감한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으나 오늘은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천남성 넓은잎천남성 두루미천남성이 즐비하고 빛바랜 현호색 고광나무 찔레꽃 산딸기 다래꽃 가막살나무 갈퀴덩굴 새모래덩굴 박주가리 푼지나무 노박덩굴, 꽃이 핀 조릿대 신이대 퉁둥글레(진황정?) 땅비수리 싸리나무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환호하는 숲 길을 지나니 어디서인지 새 쫓는 소리가 들렸고 할머니 한 분이 콩 밭에서 비둘기와 한판승부를 펼치고 계시기에 마을의 이름을 물어보니 서동마을이라고 한다.
명색이 나도 농사꾼이라는 말을 듣고 있는지라 콩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니 할머니는 올해는 가물어서 콩이 잘 안나고 죽는일도 있는데 새마져 극성이라며 뙤약볕 아래에서 연신 흘리는 땀을 훔치고 있었다.
서동골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다정한 노부부가 길을 내려오면서 여기는 농장으로 가는 길이니 건너편 길을 가면 불태산에 오를 수가 있다며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시고 계곡에는 달뿌리풀과 이름을 모르는 풀과 참나리 개당귀가 가득하고 사람주나무 까치박달나무 고욤나무 다래가 길가에 도열하듯 서서 반겨주었고 노부부가 설명해 준데로 이곳이다 싶었고 노란띠가 붙어 있어 한 점 의심도 없이 나옹암터 가는 길이라 생각하고 올라가다보니 팽나무 느티나무 신이대 조릿대가 가끔은 길을 막아서고 나옹암터를 가기 위해 40여분을 희미한 길로 들어 서서 하늘은 빼꼼하게 열렸으나 나옹암터는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에는 가시덤불이 앞을 막아 내려가기로 결정하고 골짜기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으니 벌써 모기가 달려들고 저 만치 다람쥐가 반짝이는 눈을 하며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의 목적을 달성을 하지는 못했지만 체력을 안배하고 나중에 한번 더 오려는 심산으로 하산을 하였다.
비둘기가 콩밭에 앉아 맛나게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지만 분명하게 인간의 영역이고 사람이 먹기 위해서 갈고 심은 것이므로 아직은 비둘기가 식사를 하는 것은 불법이 아닐까?.생각되어 훠이 훠이 하면서 비둘기를 쫓아내니 그늘에 앉아 새를 보던 할아버지가 왜 내려오냐며 나 보다도 더 서운해 하였다.
산을 가리키며 저 산등성이로 가면 나옹암터가 있는데 못찾고 다시 내려오는 나를 향해 설명이 불 충분해서 못 찾은 것으로 생각하였는지 입맛을 쩌억 다진다.
돌아오는 발 길은 출발 할 때보다 훨씬 무거웠고 청량하던 머리속도 등허리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도 나를 훨씬 피곤하게 하였다.
한 번 지나갔고 두번째 돌아오는 길에는 아까 지나면서 보지 못했던 숲길의 잡목속에서 온갖 벌과 나비 나방 등이 눈 앞을 현란하게 오고 간다.
*주변의 마을 유래와 문화유적들*
나옹암터가 있는 곳은 서동마을로 서동과 상동이 합해졌으며 서굴에는 500년전에 김해김씨가 살았다고 전해져 오며 지금의 김해김씨는 1700년경에 입향하였다하고 전주이씨 탐진최씨 진주강씨 하동정씨 김녕김씨 평산신씨 장수황씨 살고 있으며, 서동 유탕계곡의 위쪽에 있어 상동이라했고 상동의 서쪽에 있어 서굴이라고 했으며 지금은 서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가남쟁이는 옛날 하청사 관음전이 있던 자리라고 하고 절터로는 상청사 하청사 취봉사 인월사 나옹암이 있고 송강 정철과 석탄 이기남이 공부했던 정이암이은 6,25 때 불타버린 것을 마을 가까운 곳에 다시 지어졌으며, 용소 장성부사의 시가 남겨져 있는 운동폭포에는 하청용주(삼척동구)라고 음각되어 있다.
유탕리(流湯里)는 유탕과 서동으로 나누어져 있으며,1913년에는 서굴리 상동리 유탕리를 합쳐 유탕리라고 불렀으며, 지금은 신촌 유탕 상동 서동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온수통과 참시암의 물줄기가 여인의 젖줄기와 같다하여 유탄(乳灘)이라했는데 변하여 유탕(流湯)으로 부르고 있으며 유물유적으로는 지석묘 2기, 당산제(천룡당산, 내당산, 외당산, 연당산 현재도 지냄)가 있다.
청안(淸安)이씨 석탄(石灘) 이기남(李箕南)은 성리학에 능한 학자로 김인후(金麟厚)·박 순(朴 淳)·정 철(鄭 澈)·기효간(奇孝諫) 등과 도의로 사귀었고, 선조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사헌부 감찰 등에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기호(岐湖) 이문룡(李文龍)은 변이중(邊以中)·박광옥(朴光玉)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박광옥과 함께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서 활약하였으며 백의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고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다.
송강과 함께 서동에서 강학을 했었는데 두 사람의 성을 따 정이암이라 칭했고 나옹암터는 고려시대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 스님은 고려 충숙왕 7년(1320년) 지금의 영덕에 해당하는 영해부 가산리에서 태어났으며, 충혜왕 복위 1년(1340) 문경의 공덕산 묘적암 요연선사에서 출가했고 속성은 아씨(牙氏), 법명은 혜근(慧勤), 시호는 선각(禪覺). 지공스님 무학스님과 함께 불교의 3대 화상 가운데 한 명으로 고려말 공민왕과 우왕의 재위 시절 왕사를 지냈으며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靑山兮要我以無語),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라는 구절로 유명한 선시의 지은이기도 하다.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말없이 살라하네 푸르른 저 산들은 티없이 살라하네 드높은 저 하늘은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세월은 나를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를보고 곳없다 하지않네
번뇌도 벗어놓고 욕심도 벗어 놓고 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하네 " 라는 선시로 너무나도 유명하며 오대산 상두암 여주 신륵사에 머물렀고 양주 화암사 주지로 있을 때 절을 중창하는 동안 완공을 못 보고 우왕 2년 1376년에 입적하였고 화암사에 나옹선사의 부도가 있으나 이곳의 나옹암은 기록은 찾을 수가 없었다.
특히 나옹대사가 창건한 나옹암터에는 마애불상이 남아 있어 불심이 가득했던 옛 영화를 말해 주고 있으며, 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하청사는 매월당 김시습과 하서 김인후의 시에 등장하고, 인월사에는 매월당이 남긴 시 한 편이 현재까지 전해온다.
이처럼 불태산은 산이 깊고 넓어 한 때는 절이 많아 불대산으로도 불렀으며 견훤의 탄생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불태산 남쪽의 진원리에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노사 기정진 선생의 고산서원이 있으며 장성군청의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노사는 근세 유학의 주리파(主理派)를 대표하며 성리학 6대가의 한 사람이다.
호론(湖論), 낙론(洛論)을 마감지은 독보적인 유리론(唯理論)은 한국 성리학의 발전을 위해서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선생은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지만 장성 기씨의 후예로서 장성에서 살면서 뚜렷한 사승(師承)도 없이 평지에서 굴기(堀起)하였다. 한국 유학사의 저자인 현상윤(玄相允)은 그의 유리(唯理)를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노사는 이기설(理氣說)에 대하여 주리설을 주장하였는데 이 주리설(主理說)은 다른 주리파(主理派)의 학자들이 이원적으로 이(理)를 기(氣)에 대립시켜서 생각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오 훨씬 그 정도를 높여 그는 일원적으로 이(理)와 기(氣)를 대립시키지 아니하고 기(氣)를 어디까지든지 이(理)안에 포함하는 개념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리파(主理派) 중에서 이채를 띠는 동시에 또 그 최고봉이 되는 것이며 또 그를 유리론자(唯理論者)라고 치하하게 되는 것이다.
19세기에 가장 뚜렷한 세 사람의 유학자(儒學者)를 든다면 노사 선생과 더불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 1803∼1879)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거의 동시대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학문적 성격은 서로 뚜렷하게 다르다는 사실은 흥미를 끈다.
추사는 유학자로서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표방한 금석학자(金石學者)로 널리 알려졌으므로 어쩌면 후기 실학자(實學者)중 에서도 누구보다도 실증주의(實證主義)라고 일러야 한다면 혜강(惠岡)은 철저한 경험론자로서 성리학적(性理學的) 관념론(觀念論)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처럼 전통적인 정주학(程朱學)에서 초탈(超脫)을 시도하던 시절에 굳이 이기(理氣)논쟁을 정리하여 이분원융설(理分圓融說)을 내세우므로써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개신 유학을 내세우던 많은 실학자들이 거의 주기적(主氣的)경향을 지니었던 시절에 그의 형이상적(形而上的) 주리설(主理說)은 전통 유학의 마지막 보루로서 의미를 가졌다고 할른지 모른다.
이(理)를 기(氣)에 대비할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곧 노사가 가치중립의 태도를 벗어나 선(善)의 원리내지 선으로서의 의리를 그만큼 중요시 했음을 눈여겨 볼 수 있다. 「4단은 선(善) 일변(一邊)이므로 이(理)로써 말하고, 7정은 선악을 겸한 것이므로 이기(理氣)를 겸한 것이라 한다. 이기(理氣)의 글자는 선악이라는 자로 보아 무방한 것이다」 노사집구(盧沙集口) 이 주장에 의하면 이(理)는 아예 선(善)이고, 기는 악이라는 뜻인데, 그가 철저히 유리(唯理)의 철학을 견지하려 노력한 사실은 곧 그만큼 철저히 악(惡)을 피하고 선(善)내지 의리(義理)를 위하려는 의지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선내지 의리를 실현하려는 목적의식이 그로 하여금 철저한 유리론(唯理論)의 성리학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노사의 저서 외필(猥筆)에서는 「평범한 눈으로 보면 모든 행동이 기(氣)의 행동인 것 같으나 그 기(氣)는 이(理)의 명령을 받아서 행하는 것인즉 명(命)하는 자가 주(主)요 수명자(受命者)는 복(僕)이니 행동의 원인과 책임은 명령자인 이(理)에 있다. 세상 사람들이 만사 만물의 소장(消長) 변화를 볼때에 그것이 실로 이(理)의 사지연지(使之然之)함임을 모르고 오직 이것을 기(氣)의 작용이라 말하고, 혹 이(理)는 어느 곳에 재(在)하느냐고 물으면 다만 차(此)에 승(乘)한다고만 말하니, 이 승자(乘字)가 곧 그들로 하여금 이(理)를 경(輕)하게 알고 기(氣)를 중(重)하게 알게 한 원인이라」 지적하여 그 율곡의 학설의 잘못된 곳을 통열(痛烈)하게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가 살던 19세기의 조선조의 내외적으로 급변과 충격으로 혼란이 심해가던 시기였다. 그는 내외의 현실에 결코 외면하거나 무관심 하지 않고 오히려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대응책을 강구하기에 부심했다.
69세때 병인소(丙寅疏)를 통하여 당시의 시무책(時務策) 6가지를 정리하여 그의 구상을 진술하여 조정에서 채택하도록 촉구하였다.
「문인 정치에 치우쳐 국방을 가볍게 여기게 되었다. 활도 좀먹고 화포도 쓸만한 것이 없으며, 남아있는 총도 녹이 나서 탄환 한발도 쏠 수 없는 지경이다. 이러한 무기로써 적군을 상대한다면 한신과 백기 같은 장수가 지휘한다고 하여도 살더미째 적에게 맡겨 주는 결과가 될 것이다.」 계속 노사는 불타는 애국심으로 왜적의 침략을 막을 방책을 말하였다. (색상이 진한 부분은 장성군청에서 전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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