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옛길 제2구간을 걷다.
무등산은 매우 훌륭한 산으로 접근성이 뛰어나고 오르기가 쉽다는 장점으로 인하여 찾는 사람이 너무 많아 개인적으로 무등산을 의도적으로 잘 오르지 않고 있다.
특별한 일로 인하여 오늘은 무등산의 옛길을 따라 서석대를 거처 입석대와 원효사가 있는 산장지구까지를 가볍게 산행을 할 일이 생겼다.
원효사를 지나 옛길 2구간이 시작되는 입구에서 안내하는 봉사자(?)의 안내로 산행을 시작하였는데 몇 년전의 추억이 고스라히 묻어 있는 곳이라서 더욱 정감이 갔으며, 이곳에서 숲을 보는 안목을 키웠고 숲과 문화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배웠고 풀과 나무를 알게 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무등산은 1187m로 광주 시내 어느곳에서든지 30분에서 1시간이면 시내버스나 지하철을 타고도 산행의 들머리에 도착 할 수 있는 산으로 특징은 토산(육산)으로 산행을 하기가 쉽고 어디서나 물이 솟아 오르기 때문에 물 때문에 고생하는경우는 드물다.
천왕봉을 정상으로 지왕봉(비로봉), 인왕봉(반야봉)을 중심으로 북으로 장군봉과 화암봉을 일으켜 세우고 동쪽으로는 돌아서며 삼각산과 장원봉과 향노봉을 일으켜 세우며 광주시내로 또는 너른 들판으로 내려선다.
무등산을 백제 시대에는 무돌산, 무당산, 신라 시대에는 무진악, 무악으로 고려시대에는 서석산으로 불리다 무등산으로 불렀다.
무돌산이나 무당산 또는 무덤산이라고 불렀는데 무돌산은 광주의 옛 지명이 무돌이었으므로 무돌산으로 불렀고, 무당산은 신적(신앙)인 의미가 담겨져 있으며, 무덤산은 생긴 형상을 보고 불렀다.
무등산에는 원효대사. 의상대사, 철감선사, 지공대사, 라옹선사의 유적이 곳곳에 산재하여 있고 증심사, 원효사, 약사암, 규봉암이 불교 문화 유적으로 남아 있으며, 임진왜란 때 순국한 제봉 고경명은 유서석록을 통하여 무등산의 아름다움을 글로 남기기도 하였으며,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숨결이 무등산 곳곳에서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있는데 2구간의 들머리에서 얼마 가지 않아 주검동유적지가 있는데 김덕령장군은 이곳에서 무기를 제조하였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전해져 오고 이곳을 막 벗어나면 왼쪽에 고사목을 타고 잘 자란 줄사철나무를 볼 수가 있으며, 바로 위에 김덕령 장군에 관련한 글이 바위에 음각되어 있는데 정조12년인 1778년에 충장공이라는 시호와 함께 고향인 석저촌을 충효리로 바꾸고 왕이 마을 이름을 표기한 비석을 내렸던 기록으로 볼 때 이글은 1778년 이후에 누군가에 의해 음각된 것으로 보인다.
나뭇군의 풀피리소리가 들리는 듯한 길을 지나 전쟁의 상혼이 묻어 있는 수렛길을 지나 쉬엄쉬엄 오르다보면 서석대에 오르게 된다.
서기가 잔뜩 서린 서석대는 병풍을 둘러 친 모습으로 수정병풍이라고 불렀는데 서쪽을 향해 줄지어 서 있기 때문에 해가 지면서 햇빛이 반사되어 수정처럼 빛을 내었기 때문에 부르게 되었으며, 무등산을 서석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서석대와 같은 뛰어난 석경이 곳곳에 있기 때문에 불렀으며 돌을 돌이라고 부르지 않고 서석이라고 부른 것은 예찬의 의미를 넘는 경승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으로 볼 수가 있으며 수정병풍이라고 표현 한 것도 구체적인 해석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또 노산 이은상선생은 해금강은 바다의 서석산, 서석산은 육지의 해금강이라고 무등산 기행에서 말했으며, 이것은 해금강의 아름다움과 서석대의 아름다움을 견주어 말하고 있다.
서석대의 전망대에서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고 오르면 넓게 펼쳐진 억새 평원이 나타는데 이곳에서 마음의 짐을 모두 내려 놓고 사방을 둘러보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하늘을 볼 수가 있는 특권이 주어지고 고개를 돌리면 천왕봉이 지천의 코 앞에 있지만 직접 오를 수는 없다.
서석대를 내려 입석대를 향해 가다보면 이야기가 있는 커다란 바위하나가 잠시 우리를 머물게 하고 곳곳에 있었다는 암자들의 흔적으로 주춧돌이 움푹 패인 돌들이 보이는데 기둥을 세우기 위해 주춧돌에 구멍이 뚫여 있다는 것이 생소해 보엿다.
발 밑에는 입석대(해발 1,017m)가 5각형 또는 육각형의 돌기둥이 하늘을 향해 한개로 솟아 있거나 혹은 3~4단의 비슷한 기둥이 포개져 있으며, 높은 곳은 15m에 이르고 보통은 10m가 넘는 돌기둥들이 남쪽을 향해 반달처럼 펼쳐저 있으며, 유서석록에는 이곳에 사찰과 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주춧돌만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육당 최남선 선생은 그의 저서 "심춘순례"에서 입석대를 억겁의 풍상을 지내오는 동안에 씻기고 깍이고 지진으로 누어 장엄한 절경을 이루었다고 말 하면서 동쪽 바위에 입석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입석이란 선돌의 뜻으로 원시신앙에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표상으로 변변하지 않는 돌을 인공으로 깍아 세워 숭배하던 민속신앙으로 볼 때 하늘의 힘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거대한 입석(선돌)을 보고 숭배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무등산과 같은 거악(巨嶽)의 정상에 거룩한 선돌의 무더기가 솟아 있으니 이곳에 제천단이 되었다는 것은 지금도 남아 있는 석축으로 짐작 할 수가 있으며, 도백(도지사)이 다스리는 이곳 지방에 한발과 질병이 등어 도축의 재를 지내도 효험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하늘의 뜻을 빌기 위해 직접 제사를 지낸 곳이 입석대라고 했다.
입석대의 아랫쪽으로 보면 묘가 1기가 있으며 자세하지는 않지만 1기가 더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묘를 쓰고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석축을 쌓은 것 처럼 보이지만 이곳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재단이었다는 것은 알면서 묘를 바라보는 시선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입석대나 서석대외에도 무등산의 정상을 비롯하여 다른 봉우리에도입석대나 서석대와 같은 모습의 바위가 보이는데 이것은 마그마가 서서히 용출될 때 바위 틈으로 가스가 빠져 나오면서 오각 또는 육각의 돌기둥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주상절리라고 한다.
지금은 서석대와 입석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 하고 있으며 제주도, 울산, 연천, 철원, 통천 등처럼 강이나 바닷가에 주상절리가 모여 있는데 이처럼 무등산에는 1100m~1187m에 광범위하게 봉우리마다 주상절리대가 있다.
무등산 옛길 2구간을 지나 입석대로 내려오면서 규봉 가는 길에 지공너덜이 있는데 지공대사가 석굴에서 수도 하면서 법력으로 돌을 깔아 놓아 어느 돌을 밟아도 덜컹거리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보조국사가 수도하였던 보조석굴이 있다.
규봉암의 입구에는 커다란 돌기둥 3개가 서 있으며 이 바위를 삼존석이라고 칭하고, 여래존석, 관음존석, 미륵존석이라고 부르며 이름은 도선국사가 지었다고 한다.
관음존석은 지진으로 윗부분이 끊어져 누워 있으며, 미륵존석에는 인촌 김성수선생의 양아버지인 김기중이 동복현감으로 있을 때 동복수 김기중이라고 새겼으며, 삼존석 왼편에 광석대가 있는데 입석대와 서석대를 합쳐 무등산의 삼대석경으로 부른다.
무등산 옛길 2구간의 문화유적과 길에 얼킨 이야기와 늦재이야기를 가사문학에서 찾아 대입해 보면서 편안하게 걸을 수 있도록 개설된 옛길 2구간을 걸으면서 크게 느낀 점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잘 가꾸고 편하게 걸을 수 있도록 배려한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가 있었는데 곳곳에 막걸리병과 건강을 위해 만들어 마시는 배즙의 빈 봉지는 물론 담배갑, 과자봉지가 길 양 옆으로 많이 보이고 특히 사람들이 많이 쉬는 곳이면 어김없이 나무에 걸려있는 사과 껍질은 물론 귤껍질이 수두룩한 것을 볼 때 과일 껍질은 버리면 썩어버리니 쓰레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무등산 처럼 많은 사람들이 사시사철 끊임없이 방문하는 산에서는 볼상 사나운 쓰레기임에는 틀림없다.
산을 좋아해 산에 오는 사람들로 그냥 왔다 언제 돌아 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람처럼 왔다가 구름처럼 갈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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