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깔크막의 숲 산행 이야기

이야기와 문화가 있는 무등산 산행(배고픈다리에서 백마능선을 거쳐 안양산)

깔크막 2010. 2. 9. 02:04

 

이야기와 문화가 있는 무등산 산행 (배고픈다리에서 백마능선을 거쳐 안양산까지) 

 

무등산의 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무등산의 형태를 알아야 도움이 되는데 천왕봉을 거쳐 북봉과 꼬막재를 거치면서 소쇄원이 있는 지실마을을 품으며 도중에 윤필봉과 의상봉이라는 가지를 내면서 북쪽 능선의 역활을 하고 천왕봉에서 중봉을 지나 바람재(470m)를 지나 지산유원지의 전망대가 있는 향로봉을 거쳐 장원봉으로 내려 순천박씨의 삼산재각이 있는 군왕봉을 지나는 북서능은 광주의 동쪽의 울타리가 된다. 

반면 서능은 천왕봉과 중봉을 지나 중머리재를 넘어 학동방향인 세인봉과 2수원지 방향의 마집봉으로 가지를 내며 내리는데 이곳은 유일하게 지하철을 이용하여 무등산을 산행 할 수가 있는 곳이며, 남서능은 천왕봉에서 장불재를 지나 백마능선을 타고 안양산으로 이어지고 이곳에는 김덕령장군이 규봉 문바위에서 활을 쏘고 애마와 달리는 시합에서 애마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뻔 했던 청궁마을(마살리)이 가까운 곳에 있다.

또 다른 가지는 만연산과 수레바위산과 지장산을 거쳐 너릿재를 지나 정광산에 이르면서 봉선동의 제석산을 품게되고 광주 남쪽의 울타리를 만들면서 극락강과 지석천을 나누기도 한다.

 

광주에서 무등산으로 가는 길은 산수동을 통해서 가는 방법과 학운동을 거쳐 가는 길이 있는데 학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기 때문에 학운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무등산 천재단에서 중머리재와 세인봉과 운소봉을 잇는 산자락에 있는 아주 조그만한 산동네 였으며, 증심사와 약사암 아래 골짜기에 몇 채의 집이 있었고 성촌, 신림, 동산,  무량, 숙실마을이 있었으나 자연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마을은 증심사지구 환경개선 사업으로 인하여 이제는 거의 없다. 

학동에서 증심사입구로 들어오는 길목에 배고픈다리가 있는데 옛날에는 이곳을 "선거리" 또는 "선관이"이라고 불렀으며,  지금은 홍림교(洪林橋)로 부르고 있다.

배고픈다리는 다리의 형태가 움푹 꺼져 있는 모양을 빗대어 부르는 이름이었으며, 어떤 이유에서 움푹 꺼진 다리를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배가 고프면 배가 쑥 들어간 모양과 비슷하여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다리를 만들 때 "백오푼"의 경비가 들어 갔다하여 "백오픈다리"라고 불렀는데 구전으로 전하다보니 나중에 배고픈다리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인터넷 이름 뚬벙님이  전하는 배고픈다리의 유래를 보면 임씨 성의 효자가 어머니의 병환을 낫게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약을 구하기 위해 뛰어 다니다가 겨울인데도 상서로운 무지개가 드리워진 곳을 보니 자라가 있어 그것을 약으로 사용하여 어머니의 병이 깨끗하게 나았다는 이야기가 암벽에 글로 새겨져 있었는데 근대에 홍림교(배고픈다리)를 수리하면서 없애버렸다는 이야기를 향토사학자 이백순선생의 입을 통하여 전하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경양방죽을 만든 "김방"이라는 사람이 무진골에 한발이 잦아 배고픔에 시달리는 것을 보다 못해 경양방죽 축조공사를 하고 물을 가두어야 하는데 삼년간이나 비가 오지 않아 배고파 쓰러지는 백성을 보다 못해  사흘 밤낮을 정성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본 백성이 김방의 건강을 염려하여 닭을 잡아 상에 올렸는데 그는 닭똥집만 먹고 나머지는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임금(세종대왕)이 낮잠을 자는데 닭들이 때로 몰려와 김방이 무등산에서 역적모의를 하고 수천명의 장정을 모아 놓고 군사훈련을 시킨다는 말을 듣고 금부도사에게 김방을 삼일 안에 잡아드리라고 명하여 금부도사가 배고픈다리 근처인 선거리에 도착하자 말과 사람이 땅에 붙어 한 발자국도 못가고 있었는데 다시 세종의 꿈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김방은 닭내장을 요리해 먹은 것은 사실이나 김방은 김제의 벽골제를 축조하고 지금은 경양방죽을 만들고 있으며, 나중에 증심사를 중수하고 오백나한을 조성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전하자 세종은 그때서야 자신의 우매함을 뉘우치자 어디선가에서 어명이라는 외침과 함께 말과 사람이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그때 관군들이 선 채로 이틀 밤낮을 지냈다고하여 "선관이" "선거리"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움직이지 못하고 배고픔에 시달렸다하여 "배고픈다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배고픈다리를 지나면 오른쪽에 보이는 대형 창고같은 건물은 추상화가 우제길씨의 작업실이자 미술관으로 1층에 갤러리가 있고 자연 채광을 위해 천장 및 1층 전시실의 남쪽 벽을 유리로 제작되어 조명없이도 작품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으며 환상적인 빛의 세계를 펼쳐보이는 빛의 화가의 진면목을 볼 수가 있다.

광주지방의 현대미술의 산실인 무등현대미술관은 무등산 증심사 가는 길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주현대미술의 큰 스승이신 오승우선생과 임직순선생의 화업을 이어받은 서양화가 정송규선생이 광주지역에 다양한 현대미술의 경향을 소개함으로써 광주시민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지역 문화창달에 기여하고자 마련한 미술공간이 있다.

또 다른 유적으로는 남종화의 거장인 의재선생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유적과 함께 산 중턱에 시원하게 펼쳐진 녹차밭과 민족혼을 되찾자고 외치시던 민족사랑 정신과 남도문화의 정신적 지주이자 한국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 선생(1891년~1977년)은 화가이기에 앞서 민족의 진로를 걱정했던 애국지사로 무등산 마루턱에 춘설헌을 짓고 살면서 차를 보급하는 한편 농업기술학교를 세워 농업인재를 양성하기도 했으니 옷 깃을 여미고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것도 무등산 여행의 또 다른 맛이 아닐까?.한다. 

 

여기를 지나면 증심사가 코 앞에 나타나는데 증심사는 원효사와 함께 광주의 진산인 무등산의 대표적인 사찰이며, 신라 헌안왕 4년에 철감선사 도윤이 처음 창건했다고 하며, 고려 의종 11년에 혜조국사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조선 세종 25년에 김방이 세 번째로 중수 하면서 오백전을 지어 국태민안을 기원했으나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아픈 과거도 있으며, 오백나한전은 개미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김방이라는 사람이 경양방죽 공사장에서 발견된 개미집을 그대로 무등산 기슭에 옮겨 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경양방죽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의 식량으로 필요한 쌀을 개미들이 공사가 끝날 때까지 물어 날랐다고 하며 김방은 개미들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증심사에 오백전을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증심사에는 보물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는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높이 3~4미터의 삼층석탑이 있으며, 전쟁으로 대부분 소실되어 현재의 증심사는 오백나한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970년~ 1980년대에 복원된 건물이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무등산 산행이 시작되는데 중머리재를 향해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새인봉이 있고 그 모양이 옥새를 닮아 새인봉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다른 이름으로는 인괘봉, 천제등을 향해 엎드려 있는 모양이라 사인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천제단은 천제봉 또는 천제등이라고 불렀는데 신촌고개에서 왼쪽으로 돌면 "무등산개천궁건립지"라는 표지석이 있는 곳을 말하고 삼한시대 부터 제를 모신 곳으로 묘향산과 구월산 그리고 무등산에만 있었던 재단이다.

천제단은 평상시에는 국태민안을 원하는 제사를 지냈고 비(雨)를 원하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으며, 상대 중대 하대로 구성되어 있고, 일본이 민족 혼의 말살 과정으로 형태조차 알 수 없도록 파괴하였으나 의제 허백련선생의 주도 아래 개천절 제전을 매년 10월3일에 지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재단을 못 미쳐 당산나무가 있는 곳을 지나면 꽤나 가파른 고갯길이 계속되고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중머리재이다.

중머리재는 중의 머리처럼 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고 밋밋하여 중머리재라고 부르게 되었으나 편안한 능선으로 이어져 있어 사람들이 휴식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며 장불재와 입석대 서석대 규봉과 만연산을 가는 산행의 요지이기도 하다.

쉬엄쉬엄 바윗돌을 즈려 밟으며 오르다 보면 장불재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곳은 광주와 화순의 경계가 되는 지점으로 해발이 900m나 되며 옛날에 동복과 이서 사람들이 광주를 오고 갈때 지나던 고개이나 평상시에는 넘나 들기 어렵고 필요한 물건을 꼭 사야하는 장날이나 이 고개를 넘나들며 장을 보았다하여 장불재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원래 장불재는 장골재라 불렀는데 장(長)골 즉 긴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의 윗부분에 있는 긴골재를 장골재라고 부르던 것이 이곳에 장불사(長佛寺)가 생기면서 장불치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후 자연스럽게 장불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한다. 

장불재에서 입석대로 오르는 길을 생태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화순에서 25톤 트럭으로 30대분의 돌을 실어와 만들었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물론이거니와 누구나 편하게 걸을 수가 있는데 이 길을 따라 입석대와 서석대를 구경 할 수가 있으며 산허리를 감싸 돌면 지공너덜과 문바위와 삼존불이 있는 규봉암과 규봉을 볼 수가 있다.

장불재에서 통신탑이 서 있는 쪽으로 펼쳐진 능선이 있는데 가을이면 고산초원으로 사람의 키보다 큰 억새밭이 백마의 잔등처럼 각선미를 자랑하며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데, 혹여 억새꽃이 바람에 흔들리면 마치 백마가 갈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것처럼 보인다하여 백마능선(白馬陵線)이라고 부른다.

백마능선은 장불재에서 안양산 까지 이어지는 능선으로 부드럽고 경관이 매우 아름다우면서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가을이면 억새가 겨울에는 설화가 피어나는데, 설화는 남쪽에서는 흔히 볼 수 없으며 해발 800m 이상의 높이에 습도가 높은 바람이 적당하게 불어야 최고로 아름답게 상고대(눈꽃)가 형성된다.

이처럼 남쪽에서는 보기 힘든  눈꽃이 나무와 바위에 찬란한 은빛의 비경을 만들어 산행하는 사람들을 감탄하게하는 무등산의 3대 절경 중의 하나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노산 이은상선생은 설화(雪花)라는 시를 통하여 "" 높은 데 낮은 데를 골고루 덮었구나. 희고 검고를. 뉘라서 분간하리. 있는지 없는지 조차 아울듯이 몰라라.""하며 눈꽃(상고대)의 아름다움을 찬사했다.

또한 백마능선에서 바라보는 풍경 중 규봉 쪽으로는 마음이 넉넉하면서도 어머니의 포근한 정을 느낄 수가 있고 만연산 자락에 있는 산마을 수만리의 들국화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며 올라올 것 같으며 백마능선에서 눈으로 보는 경치로는 무등산의 어느곳과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는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백마능선을 타고 가다보면 안양산(安養山, 853m)이 군더더기 하나 없이 평탄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안양산 정상에서 휴양림으로 내려서는 길은 상상하는 것보다 비탈지고 미끄러워 조심하며 내려가야 하는데, 이렇게 30~40분 정도 내려가면 휴양림에 도달하게 된다.

안양산 휴양림은 개인 산림가인 진재량선생이 개발하였고 주요 수종으로는 30~40년생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주를 이루고 키가 매우 큰 소나무들이 골짜기를 덮고 있으며, 외양만 보았을 때는 정리가 안되고 초라해 보이지만 광주와 화순에 인접하여 도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인공림과 천연림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산림욕을 즐기기에는 안성맞춤으로  울창한 산림속에 수련장, 산림욕장, 방갈로, 연회장, 수영장을 갖춘 휴양림이다.

휴양림 매표소를 나가서 오른쪽으로 수만리로 통하는 둔병재(둠병재, 屯兵峙)가 있는데 군사들이 주둔하였으며, 철점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토성이 있으며, 청궁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하는 갈두재(성께)에도 흙으로 쌓은 성이 있으나 흔적은 희미하다. 

휴양림이 있는 곳은 안심마을로 원래는 안심사(安心寺)입구에 해당하여 동개라고 불렀으나 후에 안심사의 절 이름을 따라 안심리라고 부르게 되었고  뒷굴, 배남고삿, 웃고삿, 아랫고삿, 우데미, 아리데미, 응달, 양지로 구분된다.

청궁마을을 가려면 매표소를 지나 저수지 위쪽에 있는 갈두마을(칼두마을은 동면쪽이며 이서쪽의 마을은 갈두마을이다)에서 버스를 타거나 시간이 맞지 않으면 걸어서 가드라도 30분 정도가 걸리는데 이곳에는 청궁푹포가 있으며, 키는 작지만 숲학교 교장처럼 야무지고 잘 생긴 소나무가 150년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동네 입구에 있으며, 또 다른 소나무는 밭두렁에 있는데 버스시간과 동행한 일행의 근무시간이 임박하여 가보지는 못했으나 아름답기로는 여타 다른 소나무와 견줄만 하다.

청궁(청국)마을은 김덕령장군이 규봉의 문바위에서 화살을 날리고 백마를 타고 이곳까지 달려왔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곳으로 풍수지리에 의하면 무등산 주령인 안양산에 둔병재가 있는데 이곳에는 장군 대지가 있고, 칼두에는 보검장갑이 있으며 마산에는 말이 있으며, 건기봉과 성주봉의 산등이 마치 활처럼 되어있고 청궁마을과 새터마을 사이로 화살처럼 용절이 내려왔다 하여 마을이름을 청궁이라하였다고 전하며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들이 이곳에서 활을 만들었다고 한다.

5시간의 산행을 마치면서 청궁마을에서 217번 버스를 타고 돌아와 늦은 점심을 돌솥비빔밥으로 채우고 나니 세상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산행과 더불어 증심사 입구의 학운동의 유래와 보잘것 없는 배고픈다리 하나에 얽킨 유래나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면서 미술관(우제길선생의 광주와 어울리는 빛, 현대미술의 경향과 서양화가 정송규, 허백련선생의 남종화)을 둘러보고 우송 현준호제각을  둘러보는 것도 광주지방의 근대의 건축양식을 어렴풋이 짐작 할 수 있으며, 증심사와 천재단은 물론 새인봉, 중머리재, 장불재, 백마능선, 안양산휴양림, 둔병재, 갈두재의 근대 역사와 이야기가 있는 청궁마을 까지 산행을 연장하면서 보호수라는 이름으로 보호되고 있는 소나무까지 보는 산행이라면 색다른 산행으로 괞찮은 것 같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