羅州 松竹里 錦沙亭 冬柏나무(천연기념물 515호)
전남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130
금사정이 있는 마을 뒷산의 형상이 거북형인데 거북 모양의 바깥쪽에 있다하여 외구(外龜)라고 부르며 조선시대 때 이곳에 제민창(濟民倉)이 있었다.
영산강을 건너는 고월진(孤月津)이 있어 이곳에서 강을 건너면 다시면 죽산리를 통해 반남 우시장에 소를 몰고 다니기도 했다.
60년 전만 하여도 영산강변에 갈대가 끝없이 펼쳐져 장관을 이루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금사정이 지어졌을 때 선비들의 시를 보면 백사장에 백구가 졸고 있다는 묘사를 통해 60년 전에는 갈대가 무성했고 그 이전에는 모래톱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금사정의 모습을 보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정자 뒤편에 대나무 군락이 있었고 돌무더기도 없었는데 지금의 모습이 더 삭막하여 자연스런 우리 조상의 정원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보였다.
좁은 정자 터에 커다란 이동식 화장실은 현실을 고려하지 않아 편의성 보다는 차라리 정자 밖 한 쪽으로 이동하였으면 금사정의 모습이 훨씬 자연스럽지 않을까?를 생각해 본다.
금사정 동백나무를 보러 가면 한번 쯤 영산강을 멀리 쳐다보며 옛날의 나루의 흔적과 갈대의 흔적도 찾아보는 것도 밋밋하지 않는 여행이 될 것이다.
금사정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현종6년(1665년)에 금강계를 재조직하면서 다시 세워졌고 고종6년(1869년)에 중수하였으나 1973년에 다시 세워졌다.(나주시청자료참조)
세월은 흘러 금사정을 드나들던 인걸들은 오간데 없으나 금강계(錦江契)는 지금도 해남김씨(海南金氏)와 나주오씨(羅州吳氏)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금사정은 팔작지붕의 골기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2칸의 단순한 구조이며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지도 않고 그저 밋밋한 정자에 불과하지만 조선 중종 14년(1519년)에 조광조의 기묘사화로 낙향한 11인( 진사 김구, 김두, 정표, 진이손, 진삼손, 승지 임봉, 직장 나일손, 생원 김식, 정문손, 김안복, 진세공)이 금사정을 짓고 너무나 단단하여 누구도 깰 수 없는 금강계를 조직하고 절개의 증표로 동백나무을 심었다.
송죽리 금사정(錦社亭) 동백나무는 키 6m, 뿌리부분 둘레 2.4m이고, 동서수간 7.6m, 남북수간 6.4m, 나이는 500년으로 추정한다.
동백나무는 보통 군락으로 오래 자란곳을(예:선운사 동백군락)천연기념물로 지정하는데 한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경우는 없었다.
금사정 동백나무는 모양이 반구형으로 매우 아름답고 건강상태가 좋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하여 더 유명해진 것이다.
동백나무가 흔하게 자라는 남해안에는 이보다도 키도 크고 몸통이 굵은 동백나무는 많이 있지만 금사정 동백나무 처럼 아름답고 뿌리 둘레가 굵은 동백나무가 없고 동백나무 중에서는 단연 국내 최고의 아름다움를 자랑하고 있으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서야 비로소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나무이다.
금사정에는 동백나무 한 그루와 뒤편에 젊어 보이는 느티나무가 전부이지만, 500년을 자라온 동백나무가 돋보이는 것은 단단하여 누구도 깰 수 없는 금강계원의 결속력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동백나무는 모든 나무가 잎마저 피우기를 꺼려하는 눈 속에서 홀로 붉은 꽃을 피웠다가 질 때도 그 모습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통째로 떨어지는데 떨어진 꽃도 그 모양과 꽃 색도 여전히 똑같아 선비의 곧은 절개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11인의 금강계원(錦江契)들이 동백나무를 선택하지 않았을까?.를 미루어 짐작해 보며 금사정을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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