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의 유래와 봉안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482호)
담양의 시작은 지금의 무정면 봉안리에서 “술지”라는 이름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선사시대 때 “술지”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담양의 모태가 되었고 마한과 백제시대 때는 “추자혜군” 신라시대 경덕왕 때는 “추성군” 고려 성종 때는 “담주” 1018년에 비로소 담양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봉안리에 가면 현재의 동네보다 안쪽에 높고 좁은 계곡 사이에 이십여 가구가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지금은 모두 밭으로 사용되거나 숲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을은 원래의 위치보다 조금 남쪽으로 계곡과 능선 아래쪽으로 발달하여 술지1길과 술지2길을 근간으로 마을이 형성되어있으며, 마을 뒤쪽의 북쪽은 고비산과 봉황산이 차가운 북풍을 막아 겨울에는 따뜻하고 남쪽에는 매봉과 월봉산이 있어 여름에는 태풍도 쉽게 들어 올 수 없을 것 같았다.
동으로는 서암산과 설산이 서쪽으로는 남산이 있어 천혜적으로 사람이 살기 좋은 자연여건을 갖추고 있으나 농경지가 적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농경지가 적어서인지 몰라도 면소재지 뒤편의 술지1길을 옆으로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주민들의 소득을 보존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 북쪽을 재외하고 사방으로 낮은 산이 있어 사시사철 풍부한 일조량을 이용할 목적으로 공장 지붕에 태양열 집열판 설치작업을 하고 있었다.
봉안리 뒤쪽 고비산에 석탑도 있고 술지 1길을 따라 둘레길도 만들 계획이라는데 가보지 못하고 우체국 뒤편의 천연기념물 봉안리 은행나무만 보고 왔다.
천연기념물 봉안리 은행나무를 보면 무정면과 주민이 하나 되어 잘 자랄 수 있도록 은행나무 주변에 있던 주택도 이주하여 땅도 넓혀 주었고 군데군데 치료 흔적이 보여 위용은 없지만 생명력은 왕성하게 보였다.
비록 가지 끝이 잘린 모습을 보여주지만 원래의 은행나무와 맹아지에서 자란 나무와 합쳐져 가슴 높이의 나무 둘레는 우리가 상상하는 나무의 그것보다 훨씬 컸다.
가지마다 가득 달린 누런 은행이 가지가 늘어지도록 달려 있고 씨알이 잘고 동그란 우리 토종은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은행나무의 나이는 약 500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이곳에 마을이 형성된 시기를 갸름해보면 이보다 훨씬 더 나이가 먹었을 것이라고 주민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다.
은행나무는 아래로 맹아지를 잘라 내버린 흔적이 많으나 맹아지를 많이 내는 특성을 이용하여 은행나무의 세력을 원상회복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천연기념물 482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는 봉안리 은행나무는 한일합병, 광복절, 6.25전쟁처럼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면 울었다고 하며 은행나무가 있는 마을 안에는 도둑이 없어 범죄 없는 마을이라는 표지판이 자랑스럽게 세워져있다.
은행나무의 높이는 약 33m, 흉고는 8.5m로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아 매월 정월 대보름날이면 당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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