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깔크막의 숲 산행 이야기

정읍 두승산(444m) 가는 길

깔크막 2011. 4. 18. 14:29

 

정읍 두승산(444m) 가는 길

 

두승산(斗升山)은 고부의 眞山으로 호남고속도로 정읍 I/C에서 부안방향의 29번 국도에 올라 고부면소재지를 지나 바로 710번 지방도로와 만나게 되며 도로변에 굵고 잘 생긴 소나무가 심어져 있는 곳에 유선사의 입간판이 보인다.(서해안고속도로에서는 줄포I/C에서 710번 도로 고부 쪽을 이용하면 된다.)

유선사의 입간판이 있는 곳을 산행의 들머리로 많이 찾는 곳이나 이밖에도 여러 곳에서 산행을 시작 할 수가 있는 조그만 산으로 울창하거나 깊은 계곡은 없지만 호젓함을 즐기기에는 안성맞춤인 두승산은 평야지대에 불끈 솟은 산으로 백제시대에는 고사산(古沙山),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도순산(都順山), 고려시대에는 영주산(瀛州山)으로 불렀으며 후에 산의 정상에 석두(石斗)와 석승(石升)이 있어 두승산(斗升山)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영주(瀛州)읍지에 기록되어 있으며 아홉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나 밖에서 보면 칠봉으로 보이는 산이다.

정읍의 두승산(斗升山)과 부안의 변산(邊山) 그리고 고창의 방장산(方丈山)을 합쳐 신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부의 삼신산(三神山)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삼신산(三神山)이란 삼한시대 때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성지로 죄인이 숨어도 잡아가지 못하는 매우 신성한 곳을 말한다.

삼신(三神)은 우주의 운행 원리를 신(神신)이라 보는 한민족 고유의 자연종교로 신교(新敎)에서 제사를 지내던 성지(聖地)로 천황(天皇)이 내려오는 곳을 봉래(蓬萊)라고 하여 부안의 변산(邊山)을 말하고 소도(蘇塗)가 있는 곳을 방장(方丈)이라 하는데 고창 방장산을 말하며 천지(天池)가 나오는 곳을 영주(瀛州)라고 하는데 정읍 두승산을 말한다.

또한 삼신산이 있는 곳은 명당이 많은데 두승산 자락에는 오학지지(五鶴之地)가 있으며 남동쪽의 선인봉(仙人峯)을 옛날에는 귀인봉(貴人峯)으로 부르면서 귀한 인물이 많이 난다는 선인독서혈(仙人讀書穴)의 길지와 두승산 8부 능선에 유선사가 있는 비룡망해혈(飛龍望海穴)의 길지가 숨어 있는 곳이다.

삼신산의 유래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합쳐 부르는 말로 진시황제와 한무제가 불로불사약(不老不死藥)을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수 천명을 보내 불로불사약을 찾았다고 하는데 우리가 본떠 금강산을 봉래산으로 지리산을 방장산으로 한라산을 영주산으로 불렀으며 실제로 제주도의 옛 이름이 영주(瀛州)였으며, 불로불사약(不老不死藥)은 금강산의 녹용(鹿茸), 지리산의 인삼(人蔘), 한라산의 지초(芝草)를 말 한다.

두승산은 비록 산의 크기도 작고 높지도 않지만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꺼리가 많고 평야지에 우뚝 솟은 산으로 풍수지리에 있어서의 명산일 뿐만 아니라 경관이 좋은데다 호젓하게 산행을 즐기면서 북쪽으로는 넓은 평야를 조망하고 서쪽으로는 서해바다를 조망할 수 있고 풍요가 넘칠 것 같은 김제평야의 슬픈 이야기가 사방에서 수런대는 산이다.

일행이 산행을 시작 한 곳은 고부면소재지를 약간 비껴서 29번도로와 710번 도로가 만나는 곳에 유선사와 산행 안내판이 있는 남복리에서 유선사 까지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2.4km를 가면 유선사에 닿게 된다.

임도를 가다보면 길 옆에 핀 벚꽃이 도열하듯 반겨주고 자연에서 스스로 자라면서 훌륭한 외모에 아름다움까지 뿜어내는 우리 소나무의 자태에 정신이 혼미해지기도 한다.

멀리서 날아와 자리를 잡은 종지나물이 제비꽃처럼 그들 틈에서 혼란에 빠지게 하고 생강나무의 노란꽃이 진달래와 어울려 노니는 듯 아니 논 듯 어울려 흰나비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길가의 이끼가 융단처럼 펼쳐져 있는 곳에 하나 둘 현호색이 고부를 향해 우렁차게 나팔을 부르기 시작하면 어느덧 군락을 이루며 합주를 하는 모습에 넋을 빼다보면 쥐오줌풀도 꽃망울을 부풀리며 봄의 햇살 자락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 앙증맞고 괴불주머니가 옅은 보라색으로 계곡을 덮고 있는 모습에 따갑고 헉헉거리는 발걸음을 절로 쉬게 만든다.

우리 소나무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다보면 금방 유선사애 도착하게 되는데 유선사 앞에는 해송이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유선사 뒷마당의 아주 오래된 느티나무로 인해 절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으며 종각 근처에 무더기로 나 있는 느티나무들의 고고함에 세월의 무게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며 자란 주엽나무를 비롯하여 유선사 입장에서 보면 보리수나무라고 심었을 것 같은 나무를 비롯하여 유선사 어느곳에서든지 사진기만 들이대면 그냥 작품이 나올 것 같은 아름다운 곳이 유선사가 될 것이다.

 

유선사를 풀이해보면 유선(遊仙)이란 신선이 노는 곳으로 맑은 날보다 흐린 날 또는 가랑비가 내리는 날이나 안개비가 내리는 날 찾는 것이 유선사의 진면목을 제대로 감상 할 수 있다고 말 하는데 합당하지는 않겠지만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그곳에 유선사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두승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용이 바다를 향하여 날아가는 혈처(穴處)이고, 유선사에서 바라보면 민물 때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는 모습이 마치 용이 힘차게 다가오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비룡망해혈(飛龍望海穴)이라 한다.

역사가 오래된 유선사도 한 때 사세가 기우러 폐찰 될 위기에 처하였는데 1986년 비구니 性洙(속명 朴元順)스님이 약사전(藥師殿)을 헐고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세웠고 약사여래불석조입상, 종각, 약사전을 중수해 지금의 유선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임도를 따라 유선사에 당도하면 정면의 건물로 인하여 위압감은 물론이고 부적절해 보이는 건축물로 인해 실망을 했다면 대웅전을 오르는 계단의 마당에 앉아서 보면 아까의 감정은 금방 잊어버릴 것 같다.

유선사의 종각을 돌아 조그마한 석문을 통과하면서 본격적인 산행길에 오르면 호젓하고 평탄한 길이 능선을 따라 정상과 말봉, 끝봉까지 이어지면서 좌우 사면팔방으로 조망되는 정읍의 모습에 넋을 잃고 만다.

끝봉에서 되집어 말봉으로 내려오면 입석리 가는 길을 만나는데 이순신장군이 작은 부처를 시주했다는 원통암(실제모습은 함석토담집)을 지나게 되고 원통암 앞에 버짐나무(플라타너스)가 엄청난 크기로 건강하게 자란 모습을 볼 수가 있을 것이고 버짐나무도 저렇게 거목으로 자랄 수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말봉에 오르면 곡식이 풍부한 곳에서 곡식의 부피를 재는 도구인 말(斗)과 되(升)로 인하여 고부 관아에서 도량형의 표준이 될 말(斗)과 되(升)을 두승산 말봉(상봉 남쪽 봉우리)의 바위에 최석학이 만들어 놓은 것이 유래가 되었으나 정확하지는 않고 정읍시청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1883년대 어느 나무꾼의 장난으로 말(斗)과 되(升)는 훼손되고 말았으며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으나 말(斗)과 되(升)의 모습은 어렴풋이 짐작 할 수가 있다.

망선대(望仙坮)라 새겨진 바위의 왼쪽에는 수두목승(水斗木升)이라 새겨진 글이 있는데 이는 석두(石斗)와 석승(石升)의 훼손을 막지 못한 자책의 뜻으로 동초 김석곤(1874년-1948년)선생이 새긴 것이라고 하는데 물은 말과 같은 큰 그릇으로 되고 곡식처럼 작은 것은 되로 되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하나 두승산(斗升山)과의 관계는 짐작하기 어렵다.

다른 바위에 새겨진 글씨로는 망화대와 축천대를 비롯하여 후세 사람들이 낙서하듯 바위에 새겨 놓은 사람들의 이름이 난무하는 곳이다.

 

두승산에 오른 영광 출신 시조시인으로 영광중학교 교사를 역임하였고 동아일보를 통해 등단한 조운(본명 柱鉉 1900년∼미상)도 ~~솔잎 댓잎 푸릇푸릇 봄철만 여기고서/ 일나서 敗했다고 설거운 노라마라/ 오늘은 백만농군이 죄다 奉準이로다.“라는 시를 남겼다.

원통암을 지나 급경사의 언덕을 내려오면 덤불숲은 물론 딱총나무와 나도물통이와 우리 민들레가 흰색과 노란색으로 길가에 가득하고 광대나물, 자주광대나물, 광대수염과 머위가 숲의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사철나무가 원통암의 서남쪽에 서있다.

계곡을 지나쳐 내려오면 산자고가 지천이고 졸방제비꽃, 제비꽃, 고깔제비꽃, 양지꽃들이 따가운 봄의 햇살을 받으며 열심히 꽃을 피우고 있으며, 가슴둘레만 어른 두 아름이 되는 은행나무가 있는 곳에서는 한 때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을 남기기라도 하듯이 머위, 파드득나물, 쑥, 길마가지나무, 상산, 감나무, 복숭아나무가 검게 그을린 돌과 함께 있다.

보문사 입구에 흉물스러운 하우스를 지나 저수지 위편의 채석장을 지나면 승고산성 또는 영주산성이라고 불렀던 두승산성이 천연적 요새를 자랑하며 부곡리산성, 금사동산성, 은선리토성, 고부진성과 함께 방어용산성의 역할을 했다.

고려시대에 축조된 포곡식 산성으로 두승산 서쪽 골짜기를 감싼 두승산성은 성문터, 수구문 등의 시설이 일부 남아 있으나 석축의 대부분이 무너졌고 일부 석벽 원형이 남아 있고 산성의 구조는 수구에 서문을 설치하고 동남면에 남문지를 두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두승산에 옛 석성이 있는데 둘레는 1만812척(약3㎞)으로 큰 골짜기에 걸쳐 있으며 영주 때의 옛 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문헌비고”에는 삼한시대의 석축이라고 되어 있지만 산성 내에서 채집된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은 대부분이 고려시대의 것이며 영주라는 명칭은 936년(태조 19년)에 개명한 것이므로 고려 초에 관찰사를 두면서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산성의 축조연대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영주시구성(瀛州時舊城)"이라 하고 있음과 성내에 고려시대의 토기편과 기와편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행로: 만복리--임도--유선사주차장(주차 가능함)--유선사--정상--삼거리(안부)--말봉--끝봉--말봉--삼거리(안부)--원통암--폐가터(은행나무)--은씨묘소--송림--보문사--저수지--두승산성서문--입석리--만복리(총 산행시간 약 4시간)

 

*.참조: 1.한국의 역대인물에 따르면

김석곤(金晳坤)선생은

정읍 태인(泰仁) 출신으로 1874년(고종 11)∼1948년, 일제 강점기 유학자, 자는 천안(薦按)이고 호는 동초(東樵) 또는 눌어(訥語)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태인(泰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연추(金演秋)이다.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수당(秀堂) 김교윤(金敎潤)과 교유하였다.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며 바위에 글씨를 새기기를 즐겨, 내장산 서래봉(西來峰) 불출암(佛出庵)의 뒤쪽 바위에는 내장풍악(內藏楓嶽), 정읍의 두승산(斗升山) 정 상에는 수두목승(水斗木升)이라고 새겼다.

또 칠보산(七寶山)에는 도불원인(道不遠人), 상두산(象頭山)에는 산명수류(山明水 流), 백운대(白雲臺)에는 유수불부(流水不腐)라고 새겼다.

2.두승산성자료 정읍시청자료일부를 인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