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깔크막의 숲 산행 이야기

천봉산 대원사 가는 길(천봉산 609m)

깔크막 2009. 7. 6. 20:48

천봉산 대원사 가는 길(천봉산 609m)

 

천봉산 대원사는 광주 제2순환도로에서  화순방향으로 진입하여 남문로를 지나 22번 도로를 주행하다 구암교차로에서 15번도로에 올라 벌교방향으로 진행하면 주암호가 보이는데 여기서부터 몇 개의 다리를 지나면 대원사 삼거리에 대원사 벚꽃 길과 대원사 안내판이 나오게 되는데 벚꽃 길을 따라 5km 정도 진행하면 티벳 박물관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면 된다.

 

 

천봉산 대원사 일주문

 

대원사는 보성군과 화순군의 경계에 있고, 행정구역상으로는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에 있으며, 대원사는 천봉산(天鳳山 609m)의 자락에 깊고 긴 골짜기를 품은 곳에 봉황이 알을 품은 듯 아늑한 곳에 백제 무녕왕 3년인 서기 503년에 신라에 불교를 전했던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창건 신화로는 아도가 꿈에 봉황의 선몽을 받아 무등산의 봉황대까지 왔는데 봉황이 보이지 않아 3달 동안이나 산을 헤메던 끝에 천봉산에서 봉소형국(鳳巢形局)을 찾아 절을 세우고 산의 이름을 천봉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천봉산의 유래를 살펴보면 봉황과 연관이 있는데 원래 봉황은 오동나무에서 잠을 자고 대나무의 열매(竹實)을 먹고 사는 신성한 새인데, 오동나무와 관련하여 문덕면 법하마을에 동소산(桐巢山)이 있으며, 봉황과 연관이 있는 지명으로는 봉정리(鳳亭里), 봉갑사, 봉천리등이 있으며, 대원사가 있는 천봉산과 말봉산도 연관이 있고, 대원사가 있는 골짜기에 서부두골이 있는데 원래 이곳이 대원사의 창건지라는 설이 있으며, 그곳에 철마가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일본군이 땅속에 묻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천봉산의 다른 골짜기에 봉갑리가 있는데 그곳에 봉갑사가 있는데 스님이 삼천명이나 되어 밥을 지을 때 쌀뜨물이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면 밑의 백사마을에서는 그 물을 받아 죽을 쑤어 먹었다는 전설과 한지와 스님의 옷을 만드는 가사 마을이 있었으며, 봉갑사에 있는 약수를 먹으면 만병통치가 되어 전국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귀찮아진 봉갑사 스님들이 약수가 나오는 샘에 개를 묻어버렸는데 그 뒤로 봉갑사는 쇄락하여 끝내 화재로 소실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 천봉산이다.

 

 

 대원사 입구의 정자에서 바라 본 게곡의 모습

 

대원사는 보덕화상의 제자인 일승(一乘), 심정(心正), 대원(大原)에 의해 열반종의 8대가람으로 크게 중창되었고, 자진원오국사에 의해 대원사가 크게 중창되었고 정토신앙과 선정쌍수(禪淨雙修)의 도량으로 발전하였고 조선시대 영조 35년인 1759년에 현정선사에 의해 극락전, 지장전, 천불전, 사천왕문, 봉서루, 불출암등이 중건 되었으나 여순 사태와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극락전과 석조물만 남아 겨우 대원사의 명맥을 이어왔다.

대원사를 풍수지리적으로 살펴보면 봉소형국(鳳巢形局)이라는 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대원사 스님의 말에 따르면 대원사 입구의 십리 벚꽃 길을 1980년에 벚나무를 심어 조성하였는데 바로 벚꽃 길이 태아의 탯줄이고 대원사는 자궁에 속 한다고 하여 부모와 인연은 맺었지만 햇빛을 보지도 못하고 죽어간 어린 영혼을 태아령이라고 하고, 이들을 천도할 목적으로 애기석불을 만들고 언제나 깨끗한 빨간 모자를 씌워 태아령을 천도하고 있다.

 

 

(대원사 애기석불에 빨간모자를 씌워주고 천도와 명복(태아령)  

 

이야기 거리가 많은 대원사를 뒤로 하고 천봉산 산행 길로 접어드니 노각나무의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간밤에 무심하게 불었던 비바람에 떨어져 바닥에 흩어져 있는 모습이 조금은 추해 보였다.

정금나무와 털조장나무가 유난히 많았고 흔 하디 흔 한 때죽나무는 말봉산을 지나서 보이기 시작했으며, 끝내 마삭줄은 보이지 않았고 담쟁이덩굴과 까치박달나무도 어쩌다 한그루씩 보이고 쇠물푸레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쪽동백나무, 참나무종류와 서어나무가 주요 식생으로 숲을 이루고 있었으며, 어제 내린 비로 인하여 습도가 높고 무더워 등줄기에서는 쉬지 않고 땀이 흘러 내렸다.

어쩌다 보이기 시작하는 은방울과 승마가 숲 가장자리에서 보였지만 그 외의 특별한 풀들은 보이지 않았으나 하늘을 덮은 나무 사이로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이 눅눅함을 날려 보내 주었다.

산행 길은 아주 잘 다듬어져 있어 산행을 하는데 전혀 지장을 주지도 않는데, 나이 지긋한 철쭉과 진달래가 처절하게 베어져 산행 길 옆에 던져 버린 모습에서 그냥 놔 두어도 산행 길로는 넓은 편이었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하여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는데 쓰레기가 한 두 곳에 뭉텅이로 버려져 있는 모습을 보고 저래도 산이 좋아 산에 왔다고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천봉산 산행 길은 그래도 다른 산에 비하여 매우 깨끗한 편이었다.

대원사에서 까치봉까지는 계속 오르막의 연속이나 말봉산을 거쳐 천봉사에서 대원사로 내려오는 길은 대체적으로 평이한 산행 길이 계속되었고 가끔 나리 종류만 보일 뿐 식생은 대체적으로 다양하지 않았으나 대원사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연못에 핀 연꽃과 수련을 비롯하여 수생식물과 수련 종류의 다양함을 갖춘 자연학습장을 둘러보는 맛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꽃은 깨달음을 얻고 나서 이웃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심을 버리고 자비심을 가지고 이웃을 위해 사는 일이 깨달음의 삶이라는 것을 연꽃으로 말하고 있으며, 연꽃은 챠크라라고 하여 성스러운 꽃으로 백련은 라지브라고 하며 신을 낳은 어머니라고 하고 연꽃의 생태가 불교가 추구하는 것과 가장 잘 맞는 꽃이라고 한다.

연꽃은 저녁에 봉오리를 접어다가 아침에 다시 피어나기 때문에 부활과 영생의 상징이고 꽃은 향기가 좋고 씨를 구황식물로 이용하기도 했으며 약초로 사용하고 뿌리는 식용으로 하고 잎은 지혈, 야뇨증, 해독에도 사용되나 폐결핵이나 각혈에도 일정한 효과가 있어 우리 곁에서 더 소중한 꽃이 되었다.

 

 

 (대원사 곳곳에 핀 연꽃의 수려함이 돋보임)

 

대원사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면 시간가는 줄을 모르는데 주옥같은 글들이 나무마다 매달려 있어 그것을 읽는 재미가 있고 황의정승의 영정을 모신 전각은 물론 신라왕자로 태어나 육신불이 된 김지장스님을 모시는 전각을 보는 맛도 뜻이 깊겠지만, 중국 “구화산 화성사기”에 신라의 김교각이 차의 종자를 가져와 구화산에 심었으며, 차의 이름이 금지차(金地茶)라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차의 역사에서 이야기하는 대렴이 당나라에서 차의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다는 기록보다 132년이나 앞선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차 문화의 역사를 다시 써야하지 않을까?.

김지장스님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지 1500년 되는 696년에 신라 성덕왕의 왕자로 태어나 스물 네 살에 출가하여 지장(地藏)이라는 법명을 받은 뒤에 스님은 신라에서 선청(또는 지체라고도 함)이라는 흰 삽살개 한 마리와 오차송이라는 소나무 종자, 황립도라는 볍씨와 금지차라는 신라차를 가지고 중국 구화산으로 건너가서 초인적인 고행과 뛰어난 법력으로 그곳 사람들을 교화하다가 99세 되는 794년 음력 7월 30일에 열반하였다고 한다.

 

 

(대원사의 사철나무에 매달린 목탁으로 머리로 한번 치면 남을 한번 용서함: 치면 매우 아픔) 

 

대원사의 극락전은 조선사찰사료에 의하면 초창(初創)은 신라 지증왕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에 의해 창건 되었으며, 고려시대에 원오국사(圓悟國師)가 중건하였고 조선조로 넘어와서는 영조 43년에 중건하였다고 기록되고 있으며, 건물의 규모를 보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 형식의 건물로 기단(基壇)은 전면에 1m이상의 잡석축대(雜石築臺)를 쌓고 양면 및 배면은 얕은데 전면중앙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며, 초석은 자연석으로 덤벙 주초방식이며 기둥은 약간 배흘림이 있고 우주에는 미세한 귀솟음이 보인다.

공포의 형식은 형방위호부터 짜여진 다포형식으로 전후 각주간에는 공간포를 각각 2구씩 배열하였으며 출목(出目)은 외삼출목(外三出目), 외사출목(외사출목)으로 외칠포작(外七包作), 외구포작(外九包作) 형식이다. 외부쇠서는 삼앙일수설(三仰一垂舌)로서 앙설밑에는 연봉을 조출시켰다.

가구(架構)를 보면 대량(大梁)이 내고주(內高柱)에 끼워져 상부가구재 (上部架構材)를 받고 있으며 종량(宗梁은 대량(大梁)위에 놓여진 동자주(童子柱)가 받게 하였으며, 천정은 하중도리(下中道里) 위로부터 우물천정으로 처리하였고 처마는 겹처마이고 단천은 내외부 금모노단청(錦毛老丹靑)을 하였다.(보성군청 문화제 자료에서 발췌함)

 

 

 대원사 극락전 전경

 

대원사 탱화는 티벳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지장탱화 및 시왕탱화는 조선 영조 42년(1766년)에 조성한 것이며, 화기에 따르면 지장탱화는 비구나 묘성스님등이 돌아가신 어머니 정씨 영가를 위하여 대시주가 되었으며 시왕탱화의 지주자들도 대부분이 스님들로써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공덕을 빌고자 불사에 동참했음을 밝히고 있으며, 탱화를 그린 금어(金魚 : 불화가)는 18명으로 모두 스님들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중기 해인사, 송광사, 선암사, 흥국사등의 뛰어난 탱화를 남긴 의겸(義謙)의 화맥을 이은 색민(色敏)을 수석 금어로 하여 신심과 필력을 갖춘 18명의 화승들이 참여하여 이룩한 조선중기의 뛰어난 성보 문화재이다.

조선 영조 때 탁오스님과 현정스님의 중창불사를 통해 극락전, 지장전, 나한전, 성재암, 문수전, 사천왕루등을 복원하면서 시왕탱화도 조성된 것으로 보이고, 대원사 티벳 박물관에 소장된 13점의 조선 불화는 전라남도 문화재 전문위원의 심의를 거쳐 2004년 6월 12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266호로 지정 되었다.(보성군청 문화제 자료에서 발췌함)

 

티벳박물관의 전경

 

대원사(大原寺)에는 2기(二基)의 부도(浮屠)가 있는데 1기(一基)는 사찰(寺刹) 입구에 있는데 1982년 유실되었고, 자진국사(慈眞國師) 부도는 극락전 바로 오른편 원내에 유전(遺傳)되고 있으며, 이중의 방형지대석(方形地臺石) 위에 팔엽(八葉)의 복연(伏蓮)이 덮여있으며, 그 밑에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을 이룬 대석(臺石)에 두줄의 선각(線刻)을 돌리고 그 속에 면상(眠象)이 아닌 사각형의 띠를 돌렸다.

그 위로는 탑의 전체적인 균형 때문인지 아니면 중간에 유실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중대석(中臺石)을 소실한 채 바로 앙연좌대석(仰蓮坐臺石)을 올려져 있고, 탑신 역시 팔각으로 전면에는 「慈眞圓悟國師淸照塔」이라 음각 명기 되었으며 그 후면은 범자(梵字)가 새겨져 있고 통식(通式)의 탑신에 비해 높고 세장(細長) 한편으로 신라말기에 선보인 부도의 섬세함이나 특출한 조법(彫法)은 나타나지 않으며 또 석질이 달라 후보(候補)한 듯한 느낌이 든다.

실개석은 좁고 두꺼운 팔각으로 처마밑은 수평인데 그 안에 몇 줄의 원형음각의 띠를 돌렸다. 또한 옥상(屋上)은 기왓골이 있고 경사가 급하며 우동(隅棟)을 내려와 전각(轉角)에서 밋밋한 반전을 보였다. 상륜부에는 복발(覆鉢) 이 있고 그 위로 구형석재 두 개가 보주(寶珠)로 올려져 있는데 이는 뒤에 후보한 듯하다.

이 부도(浮屠)는 보림사의 동부도 복연, 양연의 화변이 끝에서 넓적하게 퍼진데 반해 연변(蓮辯)의 첨단에서 뽀쭉하게 빠진 것이 특이하며, 후대로 내려오면서 보인 양식상의 변화임을 엿볼수 있으며, 자진 원오국사는 송광사 제5세 국사로서 서기 1215년에 태어나 충렬왕 12년(AD 1286년) 72세로 입적할 때까지 약 30여 년 동안을 조계산 송광사에 머무르면서 종사를 크게 떨쳤으며 한때 이곳 대원사에 주석(住錫)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이 부도의 조성도 이 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성군 문화제 자료 발췌함)

 

이밖에도 백민미술관은 이 지역출신 서양화가로 국전 심사위원을 지낸 구상화가 백민(百民) 조규일(曺圭逸) 화백이 자신의 작품과 소장하고 있던 국내외 유명화가들의 회화작품 등 350여점을 보성군에 기증했고, 보성군은 주암댐 건설로 인해 폐교된 초등학교를 매입 미술관으로 개수해 1992. 12.17. 문을 연 백민미술관은 1층에 조규일 화백실과 동양화실 그리고 국제관이 있는데 동양화실에서는 이 지역 출신 서예가들의 귀한 작품과 조선후기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고, 국제관에서는 북한 공훈 미술가들의 작품과 제정 러시아 시대의 목판 성화(聖畵)를 비롯해 러시아에서도 보물급으로 알려진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2층에서는 국내외 유명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으며, 전시실은 자연채광방식을 채택하고 있기에 밤이 되기 이전에는 항상 자연광 속에서 작품을 감상 할 수 있다.

자연채광 방식은 유해광선을 차단하고 밝은 빛만 투과되도록 하는 특수기법으로서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이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고 러시아에서는 일반화된 것이라고 한다.(보성군청 문화제 자료 발췌함)

 

또 근처에는 서재필기념공원이 있는데, 서재필 선생은 1864년 1월 7일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서 태어나 농촌의 풍경과 정서를 익혔으며, 1884년 갑신개혁을 주도해 3일천하를 이룬 뒤 이의 실패로 망명 미국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박사가 된 후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민중운동을 이끌어 오는 등 평생을 조국의 광복과 근대화를 위해 열정을 다하다 1951년 병석에서 우리나라 명운을 통탄하며 8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는데, 선생의 생전의 위업을 기리고자 1992년 사업을 시작하여 사당건립, 송재로 개설, 독립문건립을 통해 유적지로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조각공원 조성, 유물전시관 건립, 생가 등을 복원하여 명실상부한 기념공원으로 서재필선생 생전의 유품 800여점을 전시한 유물전시관이 개관 되었다.

이처럼 대원사 가는 길에는 문화예술 공간의 지방화를 선도하는 백민미술관과 향토적 맛을 그대로 간직한 천년 수도 사찰 대원사, 선사시대의 유적을 한데 모아 복원한 전라남도 고인돌 공원과 함께 새로운 교육문화 공간으로서, 유적탐방 자원이 풍부하고 주암호를 구경하고 도자기체험도 할 수가 있는 곳이다.

 

산행로는 대원사 입구---까치봉---삼거리---말봉산----마당재---천봉산---임도를 가로질러 ---

             대원사 주차장(약 6.5km 3시간)

산행로의 특징  1. 대원사 입구에서 까치봉까지는 계속 올라가나 이후는 매우 평탄하고 천봉산에서

                         내려가는 곳은 약간 가파른 길이 계속됨.

                      2. 나무가 울창하여 하늘이 안 보이고 산행길은 정비가 아주 잘 되었음.

                      3. 볼거리로는 털조장나무와 노각나무가 있으며, 천봉산 정상에서만 주위가 약간 조망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