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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서원(鳳岩書院)이야기

깔크막 2010. 5. 6. 10:18

 

봉암서원(鳳岩書院)이야기

 

봉암서원(鳳岩書院)은 장성읍에서 백양사 쪽으로 가다보면 황룡리와 연결되는 고가도로가 있으며 고가도로 밑을 통과하여 1km 정도 직진하면  안평역이 있다.

안평역 앞에 있는 길 이름이 화차길인데 이 길을 1.5km정도 직진하면  장안리에 도착하게 되고 동네 입구에 아름답고 품격이 있는 우리 소나무가  왼쪽에 서 있고 맞은편의 낮으막한 산에 영사정(永思亭)과  영천이씨정려가 있다.

화차길이란 독특한 이름을 얻게 된 길의 내력은 망암(望菴) 변이중(邊以中 1546년~­1611년)선생과 휴암(巖) 변윤중(邊允中)선생에 의해 권율장군이 행주산성에서 크게 승리한 원동력이 된 화차(火車)를 발명했기 때문에 이름이 붙혀지게 되었다.

영사정 아래의 길을 따라 장안리 깊숙이 봉암석불이 있는 봉암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암서원의 뒤에는 울창한 송림이 펼쳐져 있고 서원의 안에는 자목련, 박태기(밥태기)나무, 배롱나무, 단풍나무, 참빗살나무, 남천, 철쭉, 동백나무, 작약, 은행나무, 앵도나무, 매화나무가 주요 수종으로 자라고 있으며 입구의 삼강정려 주변에는 광나무, 사철나무가 흐드러지게 핀 민들레를 앞에 거느리고 영사정과 멀리 제봉산을 바라보고 있다. 

 

봉암서원의 초입에 황주변씨삼강정려각(三綱旌閭閣)이 세워져 있는데 보통 삼강정려라함은 사람의 근본 도리로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하게 지켜야 도리를 다한 충신과 효자, 열녀를 표창하여 동네 어귀에 정문(旌門)을 세워 뜻을 기리도록 하는 것이다.

황주변씨삼강정려각(三綱旌閭閣)은 충신 휴암(巖) 변윤중(邊允中)선생을 모시고 있으며  변윤중의 부인 함풍성(成)씨와 며느리 장성서(徐)씨가 모셔져 있다.

휴암(巖) 변윤중(邊允中)선생은 망암(望菴) 변이중(邊以中)선생의 사촌 동생으로 학문에도 매우 뛰어났지만 만석군 부자이며 화차를 만들 때 모든 경비를 대며 공을 세우며 왜적을 물리쳤고 선조 때는 상의원 직장을 지내기도 했다.

선조임금을 평안도 피난길에 변이중선생과 함께 모시기도 했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식솔로 거느리고 있던 종은 물론 장정 200여명을 모아 의병장이 되어 장안리에서 10여일 동안 전투를 벌렸으나 큰 부상을 입고 마을로 돌아와 부녀자와 어린아이를 피난하도록 한 다음에 도망하는 것은 장부의 도리가 아니라며 황룡강의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만다.

휴암선생이 순절하자 선생의 부인인 성씨가 강물로 뛰어들어 남편의 뒤를 따르자 아들 변현윤과 며느리 서씨가 부엉이바위 밑에서 부모의 시신을 발견하고 아들 현윤이 뛰어 들려고하자 서씨부인이 당신이 죽으면 우리집안의 손이 끊기게 된다며 남편을 밀어내고 서씨부인도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날리고 만다.
나중에 전라감사인 조종필이 변윤중을 충신으로, 성씨부인을 열녀로, 서씨부인은 효부로 조정에 상소하니 고종은 변윤중선생을 이조참의로 증직하고 삼강정려를 내렸다.

변윤중(邊允中)선생의 호가 휴암()인 것은 부엉이바위를 말하고 있으며 그의 호를 알고나면 충과 효에 얽킨 한 가족의 내력이 담긴 것을 알수 있고 나라가 나약하면 이처럼 슬픈 역사를 남기게된다는 것을 이곳 삼강정려 앞에 서 있는 순간만이라도 기억해야한다.

 

 

삼강정려의 옆의 시징당(是懲堂)은 망암(望菴) 변이중(邊以中)선생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선생은 28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권지교서관정자(權知敎書館正字)벼슬을 시작으로 황해도 도사 풍기군수등 여러 내외직을 거쳐 어천 찰방시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19일만에 한양이 함락되자 선조 임금에게 시무책(당장해야 할 일)을 말씀드리고 하루 밤 사이에 말 200필을 조달하여 임금의 피난길을 도왔다.

임진왜란 당시 행주산성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화차를 발명한 망암 변이중 선생은 때 군량과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를 연구개발하여 사촌동생 휴암(巖) 윤중(允中)의 도움으로 300대의 화차를 만들었고, 이 중에서 40여 대를 행주산성의 권율(權慄) 장군에게 보내 행주산성에서 3400여명의 우리 군사가 3만명의 왜군을 크게 무찌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1593년 2월22일)  

화차는 원래  1451년(문종)에 만들었던 "문종화차"를 왜군의 조총의 공격을 무력화 시킬 수 있도록 오늘날의 장갑차처럼  철갑을 씌우고 4면에 40개의 구멍을 내어 구멍마다 총통을 장치하였다.

화살 3~4개가 들어가는 통이 만들고 이 통을 가로로 5개 세로로 10개를 장착하고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서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 한 번에 200발의 화살이 사방으로 발사되도록 연구개조하여 만든 무기중 화차(신기전)와 총통과 그외 무기 18종의 모형을 시징당에 전시하고 있다. 

장성에서 백양사를 가다 보면 중간에 있는 조양리(朝陽里)라는 곳에서 화차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제작비용을 댄 사람은 망암의 사촌동생이자 만석꾼이었던 변윤중(邊允中1550년~1597년)으로 전 재산을 여기에 썼으며 스스로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10일을 끝까지 싸우다가 크게 부상을 입고 부엉이바위(휴암 巖) 에서 황룡강으로 뛰어 내려 순절하는데 부엉이바위의 위치는 확인하지 못했다.

 

 

봉암서원(鳳岩書院)이 위치한 장안리(長安里)는 원래 장안과 장재의 두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읍서면에 속하다 1789년에 장안과 봉암으로 불렀고 1912년에는 봉암과 월봉으로 부르다 1914년에 수산, 봉암, 월봉을 장안리라 부르며 장성면에 편입되었다.

장안리에는 아주 오래 전에는 남양홍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으며 고려 공민왕 때(1364년) 황주 변씨(입향조는 변정)가 입향하여 봉암에 살았고 월봉마을에는 황주변씨가 아닌 타성들이 살았으며 6.25 전쟁 때 120여명이 죽는 수난을 당하기도 한 장안(長安)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과 한국전쟁 때 큰 피해를 입었다.

원래는 담안(장내)라고 부르다 장안이 되었으며  국난 때 마다 의병장으로 활동한 애국지사가 끊이지 않고 배출되었고 유학자가 대를 이어 탄생하는 뼈대있는 마을로 간직하고 있는 유물로는 지석묘(봉암마을 앞), 영천이씨정려, 영사정, 황주변씨삼강정려, 기옹정, 봉암서원, 충혼비, 봉암석불이 있다.

임진왜란 때 휴암(巖) 윤중(允中)이 원당골에 살았으며 윤중과 같은 큰 부자가 살아 장자터라 하다 장재로 부르게 되었으며 한국전쟁 때 40여명의 마을 주민이 피살되는 수난을 겪었다.

 

봉암서원(鳳岩書院)은 장성군 장성읍 장안리 19번지 봉암산 자락에 소재하고 전라남도 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조선(朝鮮) 숙종(肅宗) 23년(1697년)에 망암(望菴) 변이중(邊以中 1546년∼1611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유림들의 발의로 창건한 서원으로 1697년(숙종 23년)에 망암(望菴) 변이중(邊以中)선생을 주벽으로  1707년에 광해군(光海君) 때의 간신 이이첨(李爾瞻) 등을 상소공책(上疏攻責)하였던 자하(紫霞) 변경윤(邊慶胤)을 배향하였고, 1728년(영조 4년) 임진왜란 때 입암산성(笠岩山城)에서 순절한 율정(栗亭) 윤진(尹軫)장군(將軍)을 숙종(肅宗)떄 대유학자인 청류당(聽流堂) 변휴(邊烋)를 추배하였다.

1871년(고종8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毁撤令)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76년에 현재 위치에 복원하고 1984년에 2차 복원을 마치고 상의원(尙衣院) 직장(直長)을 지낸 휴암(巖) 변윤중(邊允中)을 1989년에는 명산(明山) 변덕윤(邊德胤)과 1994년 묵포옹(墨逋翁) 변치명(邊致明)을 추배하였고 제향일은 매년(음력) 2월 20일과 8월 20일이다.

봉암서원(鳳岩書院)은 대문 격인 외삼문(外三門)의 두남문(斗南門)을 들어서면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앞 쪽에 교육 공간을 조성하고 뒤 쪽에 제사 공간을 배치하였다.

교육 공간으로는 유림의 회합 장소이면서 교육 장소로 사용하던 성경당과 유생들이 숙식하던 곳인 훈덕재(서재)와 경의재(동제)가 있다.

내삼문을 오르면 사당인  제사 공간으로 중앙에 위패를 모신 종앙사가 있다.

 

  

망암 변이중 (望菴 邊以中 1546년∼1611년)선생은 장성읍 장안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황주로 13세에 청계 박원순에게 백우당 박상의와 함께 배웠고 20세에 성우계를 22세에 이율곡을 만나 성리학의 길을 터득했다.

23세에 성균관 생원시와 27세에 문과 초시에서 문과 1등, 28세에 문과 병과(丙科) 1등으로 합격하여 권지교서관정자(權知敎書館正字)로 관직을 시작하였으며, 선생은 조선 중기 때 공신이고 자는 언시(彦時) 호는 망암(望菴 )이다.

32세때 부상(父喪)을 당하자 지극으로 예를 다하였고 묘소의 남쪽 봉우리에 작은 암자를 짓고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서쪽 대(臺)위로 올라 묘소를 바라보며 곡(哭)을 하였으며 이때 그 바위를 망암(望菴)이라 불렀고 자연스럽게 아호로 삼았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의정 윤두수(尹斗壽, 1533~1601)의 천거로 호남소모사가 되어 병마와 무기를 갖추어 수원에 주둔하고 경기도 지방에 침입한 왜적과 싸워 혁혁한 공을 세웠다.

문신이며 학자로 군사 전략에 밝은 전략가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웠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火車圖說)" 등의 논문을 써 화차(火車)와 총통(銃筒)을 발명하고 순찰사(巡察使) 권율(權慄) 장군(將軍)을 지원하여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이루게 하였다. 

61세에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하곡(霞谷) 정운룡(鄭雲龍) 추담 김우급선생과 여러 유학자와 경전을 토론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쓰면서 1586년에 광주(광산) 출신인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1572)과 향헌(鄕憲)을 만들어 봄·가을로 강습하게 하여 향약의 토착화에 기여하다 66세로 생을 마치자 왕은 선무원종 1등공신 가선대부이조참판 등의 벼슬을 증직하였다.

선생의 문집은 6권 1책으로 간행되었는데 1권은 한시 31편, 2권은 상소 3편, 편지 33편, 3권은 잡저 5편, 서·발·축이 각 1편, 제문 3편, 묘갈명 1편 등이 있으며 4~6권은 모두 부록이다.

 

자하(紫霞) 변경윤(邊慶胤1574년~­1623년)선생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자는 자여(子餘) 호는 자하(紫霞)이며 본관은 황주이다.

우계 성혼의 문인으로 1603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자 윤기의 대변을 통열하게 논박하고 정인홍과 이이첨 등의 죄상을 낱낱이 열거하여 상소하였으나 상신 박승종의 주청으로 중죄를 면하였다.

선생은 입암산성 아래 자하동에서 제자들과 강론하다 여생을 마친 뒤에 예조참의에 추증되고, 저서로 자하집 4권이 있다.

 

율정(栗亭) 윤진(尹軫 1548년­~1597년)장군은 조선 선조 때의 의병장으로 자는 계방(季邦) 호는 율정 본관은 남원이다.

효행으로 선공감봉사로 추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장성에 있는 서재의 별업에 돌아와 있다가 1597년 정유재란 때 입암산성 수성장에 임명되자 당일 처 권씨와 아들 운구를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왜적은 성에 육박하였고 4읍의 군수는 모두 도망치고 없어 일단 피했다가 다시 전략을 써서 싸우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가 있었으나 뿌리치고 성을 지키다 전사하고 처 권씨도 같이 순절하니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청류당(聽流堂)변휴(邊烋1640년~­1699년)선생은 조선 인조 때의 학자로 자는 미경(美卿) 호는 청류당으로 본관은 황주이다.

통덕랑 세기의 아들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조부 송계공에게 수학하여 초시에 여러차례 합격하였고 숙종 기사년 전시(殿試)에 응시하였으나 인현왕후가 폐위되었다는 이야기에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고 나와 송춘 송준길, 현석 박세채 , 명재 윤증, 구천 이세필  등의 문하를 출입하면서 경학과 성리학에 더욱 정진하였다.

현석 박세채와 유약재의 천거가 있었고 암행어사와 감사의 주청도 있었으나 끝내 왕명은 얻지 못하였으며, 송계공이 편찬한 오산명인록을 목각 간행했고 모암서원 청액소를 올려 윤허를 얻었으며 조양산 부자(父子)에게 충신정려를 내리게 하였으며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전라남도가 그 문집을 향토자료로 간행했다.

 

휴암(巖) 변윤중(邊允中 1550년~1597년)선생은 조선 중기의 의병장으로 자는 공신(公信) 호는 휴암(巖) 본관은 황주이며 상의원직장에 임명되어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모셨으며 망암 변이중선생이 화차를 연구개발하고 있을 때 해당 경비를 모두 대었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장안리에서 왜군과 싸우다 크게 부상을 당하고도 동네까지 돌아와 아이와 부녀자를 안전하게 피신하게 하고 왜군에게 잡혀 죽느니 자결하는 것이 남자(군인)로써 도리라며  장안마을 뒤 휴암(巖) 즉 부엉이바위에서 황룡강으로 투신하여 순절하였으며 이때 처 함풍성씨와 며느리 장성서씨가 같이 순절하니 전라감사인 조종필이  조정에 상소하여 삼강정려를 내렸다.

 

명산 변덕윤 (薇山 邊德胤 1593년­~1655년)선생은 조선 중기의 의병장이며 본관은 황주이고 복중의 아들로  장안리에서 태어나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병자호란(1636년)당시 의병과 의곡을 모아 상경하다 치욕적인 항복소식을 듣고 되돌아와 백암 명정산 속에 은둔하여 스스로 자호를 명산이라 부르고 최명길의 추천에 사옹원 봉사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만년에 어버이 묘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살았으므로 여남처사(廬南處士)라고 불렀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문집은 후손 변시연에 의해 1993년에 2권 1책으로 간행되었다.

 

묵포 변치명 (墨逋 邊致明 1693­년~1775년)선생은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자는 성보(誠甫) 호는 묵포공 본관은 황주이다.

망암의 5대손이며 증 의정부 좌참찬 일(佾)의 아들로  장안리에서 출생하여 가정에서 학문을 닦은 선생은 1722년(경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 1750년(영조 26) 성균관시에 장원급제하여 이듬해 다시 전시병과로 합격하였다.

승정원주서, 승문원정자·, 이조, 예조, 병조의 좌랑, 정랑 등을 지내고 1753년 사헌부지평, 한성부윤, 승정원승지 등을 거쳐 1769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선생은 지평 때 사직소를 올리면서 학풍을 일으켜 행정에 근면할 것과 무신년(1278년)에는 역도를 처벌할 방안을 언급하였고, 장령 때에는 언로개혁과 인재등용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벼슬은 공조판서에 올랐고 효헌공(孝憲公) 시호를 받았으며 저서인 묵포집이 1986년에 3권 1책으로 전라남도에 의해 간행되었다.(일부의 글은 장성군청의 자료를 인용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