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깔크막의 우리동네 이야기

요월정 원림 이야기

깔크막 2010. 4. 14. 13:28

 

 요월정 원림 이야기

 

요월정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70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장성군 황룡면 황룡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요월정이 위치한 황룡리는 사장봉, 중토봉, 팔선봉, 수산, 수연산, 수련봉, 동구산이 좌우와 마을 뒷쪽을 휘감싸 안고 있고 먼 앞에는 옥녀봉, 봉화산이 더  멀리는 용진산이 바라다보고 바로 앞으로는 황룡강과 용화천이 흐르는 새낙굴에 둥지를 틀고 있는 아름다운 마을로 교육자와 학자를 특이하게 많이 배출하는 마을이다.

한 때 국가 시책으로 황룡강의 물길을 직선화고 천변을 개간하여 농지로 만들고 새로운 마을이 생기면서 요월정의 자연환경이 많이 훼손되어 지금은 황룡강은 흐르지 못하지만 황룡강의 지류인 용화천은 그래도 명맥을 유지하며 겨우 농사철이나 비가 오는 날에나 흐르고 있다.

요월정의 경치를 극대화하려면 황룡강의 물을 강제로라도 용화천에 흐르도록 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옛스럽고 고풍스러운 자연환경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수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지만 깍아지른 절벽 (낙화암)밑으로 소(沼)가 있었다는 곳은 습지와 같은 작은 연못이 형태만 있어 당시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옛날 요월정 소(沼)의 물고기는 힘이 좋아 아주 맛있었다는 이야기는 전설로만 들리고 그곳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시를 읊조리며 옥녀봉의 옆구리로 오르는 만월을 바라보는 낭만은 지금은 없다. 

                                                    (요월정의 근경)

 

요월정은 조선의 명종 때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지낸 사복시정(요월정) 김경우 선생(1517년~1559년)이 1550년대에 산수를 벗하며 학문을 논하고 풍류를 즐기고 후학과 소통의 장으로 이용하기 위해 만든 정자로 당 대의 명사인 하서 김인후 선생(1510년~1560년), 고봉 기대승 선생(1527년~1572년), 송천 양응징 선생(1519∼1581), 문곡 김수항 등이 모여 시를 읊고 학문을 논하였던 역사적인 곳이며 경승지이다.

요월정은 정면3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으로 2개의 방과 동쪽으로 마루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정(亭)과 당(堂)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으나 평면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형태로 보아 정(亭)보다는 당(堂)에 가까운 건물로 1811년에 1차로 중건하였고 지금의 건물은 1925년 후손(광산김씨 문숙공파)인 김계두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후손인 황주 김경찬(1796년~1879년)선생은  요월정의 경치를 찬양하며 조선제일황룡리라는 현판을 썼다가 임금이 그럼 조선의 한양은(?)하고 묻자 천하제일한양이라고 답해 겨우 위기에서 모면했다고 전하고 있다.

 

요월정의 자연환경을 보면 앞으로 황룡강이 있고 요월정을 감싸고 있는 산과 함께 주변에 빼어난 송림이 우거져 있으며 동쪽에는 거대한 절벽과 함께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고 요월정 아래는 용화천이 만들어 낸 연못이 있고 연못 안에는 물옥잠, 붓꽃, 흑삼룡, 동의나물, 택사, 털부처꽃, 애기부들, 창포와 같은 수생식물이 자라고 있다고 되어있고 민들레, 애기똥풀, 괴불주머니가 곳곳에 피어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요월정 주변의 넓은 원림에 사는 나무로는 자연적으로 자란 아름드리 소나무가 주 숲을 이루고 있고 남쪽과 동쪽의 급경사 부분에 심어져 가꾼 배롱나무가 군락으로 자라고 있어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온통 붉은 꽃빛이 황룡강과 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담양의 명옥헌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고 물에 비치는 맛을 없어도 한쪽면이 전체적으로 붉게 타는 듯한 배롱나무의 꽃이 한창일 때는 진한 녹색의 소나무와 어울려 명옥헌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맛 볼 수가 있을 것 같다.

 

                                                       (요월정 입구의 탐방로의 모습) 

  

(요월정 원림의 소나무)

 

그외에도 능수벗나무와 벗나무, 참나무류, 참죽나무, 은행나무, 대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관리는 대체적으로 잘 되어 있고 마을 앞에 음용수 시설과 주차장은 물론 화장실과 편히 쉴 수 있는 황룡정까지 만들어져 있어 부담감없이 쉽게 찾아 볼 수 있도록 시설되어 있으며 탐방로도 완벽하게 잘 갖춰져 있다.

장성에서 734번 지방도로를 따라 임곡방향으로 1.5KM 정도 황룡강을 따라 진행하다보면 회사촌이라는 마을과 함께 농공단지가 있으며 장성과 하남산업단지와 삼서방향과 요월정(황룡리)으로 가는 사거리를 안내하는 도로표지판에 요월정이 표시되어있다. 

요월정의 다른 내력은 요월정 절벽의 바위를 낙화암이라하는데 임진왜란 때 일본인의 만행을 피해 절벽에 모인 황룡리에 사는 여양 진씨 부녀자 8명이 뛰어내려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부녀자를 위로하고 나라를 잃는 설움을 알게하는 바위 절벽을 낙화암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절벽 밑에 거대한 소에는 용이 살고 있었으며 용이 승천했다는 용바위가 있다. 

(배롱나무 숲)

 

요월정 원림에서 소나무 다음으로 많이 보여주는 배룡나무는 나이를 아주 많이 먹어 보이지는 않지만척박한 급경사지에 심어져 있었기 때문에 잘 자라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나이는 꽤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요월정이 1550년에 창건되었고 1차 중건이 1811년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중건 당시 장성 황룡리에 사는 후손 황주 김경찬(1796~1879)은 15세 정도의 나이에 瑤月亭 重修韻 을 썼는데 

百日花紅度畿秋 重光重喜且重修

朝鮮第一黃龍里 夜月更三白露洲

好個東山還舊主 超然南國有名樓

鳳凰己去臺空在 安得試仙與共遊

라는 시를 통해서 보면 황주 김경찬선생은 1796년~1879년까지 살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배롱나무가 요월정에 있지 않았을까를 조심스럽게 유추해본다.

"백일화홍"이라는 싯귀를 요월정의 모습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배롱나무의 모습을 비유하였을 수도 있겠지만 중수운에 나오는 싯귀로 보아서 요월정의 당시 모습을 시로 나타내지 않았을까?.한다.

또 "백일화홍"이 배룡나무라는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백 일 정도 붉게 꽃 피우는 나무는 배롱나무가 유일하기 때문에 중수운(重修韻)의 시로 인하여 배롱나무는 1차 중건 전에도 있었지 않았을까를 유추해 보지만 어디를 보아도 400년~200년이 넘었을 것 같은 배롱나무나 배롱나무 그루터기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배롱나무의 역사성을 높이 평가 할 수 없으며 현재의 배룡나무는 1925년 2차 중수 때 심어 나이는 90살 정도라면 맞을 것 같다.

황주 김경찬선생은 이 시를 통하여 요월정 김경우선생을 봉황에 비유하였고 인적이 끊긴 요월정을 바라보면서 옛 주인(요월정 김경우)과 함께 놀던 깊은 산에 있는 요월정을 잊지않고  달빛은 돌아왔지만 시를 주고 받을 만한 학문이 높은 사람이 없어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

 

 

  

                                                            (요월정 전경)

 

우리 조상들은 정원에 배롱나무를 심어 가꾸면서 몸뚱이를 거대하게 키우며 자만하지 않고 나무의 껍질처럼 한점 부끄러움이 없도록 깨끗하게 살고  어떤 태풍과 폭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늘 한결같이 100일을 꽃 피우는 배롱나무의 끈길짐과 청렴결백과 지조를 본 받고 싶었을 것이다.

황룡리에는 나주 공산에 살던 김자진(金子進)의 맏아들 김충손(金衷孫)은 입향하였고 김충손(金衷孫)의 후손들은 걸출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고 김충손의 증손 김경우(金景愚)의 묘는 장성군 동화면 면소재지 근처에 있고 김자진의 아들 3형제의 위패를 봉안한 숭모사(崇慕祠)가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