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금안리 쌍계정 羅州雙溪亭(시도유형문화재 34호)
전남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251-1
고려시대 정가신의 명문장에 반한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가 하사한 옥대를 매고 금안장을 올린 백마를 타고 금의환양하여 금안동(金鞍洞)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기와 숲이 우거져 새들의 낙원이라는 금안동(禽安洞)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마을이다.
1400년대 전후로 나주 나씨와 지씨가 마을에 정착한 이후 문평면 죽곡에서 거주하던 하동정씨 정지(鄭地) 장군의 증손인 정서(鄭鋤)가 1500년대 전후로 금성산 아래 금안리에 정착하여 집성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금안동은 정읍의 태인, 영암의 구림과 함께 호남의 3대 명촌 으로 꼽힌다.
12개의 자연마을에는 서원, 정자, 재실이 20여개가 있고 효자비 등 비석이 100여개, 고인돌이 56기가 널려 있으며, 고려 때의 첨의중찬 정가신과 조선시대의 대 학자인 신숙주도 이곳 태생이다.
금안동은 비단 정가신이나 신숙주를 배출해서 명촌이 아니라 4백 년 간 마을 사람들이 화목하고 마음을 합쳐서 동내를 가꾸자는 취지의 대동계를 이어 내려온 점에서 더욱 명촌으로 꼽힐만하다.
이 대동계는 임란 직후 황폐해진 마을을 다시 일으켜 세우자는 뜻에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오늘날 지방자치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 문화제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인 쌍계정(雙溪亭)과 설재 정가신을 배양하기 위해 1688년(숙종14)에 세운 설재서원, 사암(思庵) 박순(朴淳)을 흠모하여 1659년(효종10년)에 세운 월정서원이 있다.
쌍계정은 고려 충렬왕(재위 1274∼1308) 때에 문정공 정가신이 세웠다고 전하는 정자로 이름은 정자 좌우로 계곡이 있고 물이 흐르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문정공은 이곳에서 김주정, 윤보와 더불어 학문과 인격을 갈고 닦았는데 이런 이유로 삼현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뒤 조선 세조(재위 1455∼1468) 때 정서, 신숙주, 신말주, 김건, 홍천경 등 당시의 대표적인 학자들이 학문연구 장소로 사용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금도 여름이면 서당을 열고 매년 4월20일이면 대동계를 치르고 있으며, 쌍계정은 여러 차례 증수를 거치는 동안 처음의 모습과는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쌍계정 모습도 품위가 있어 아름다웠다.
현판은 한석봉이 썼으며, 1957년 대동계를 운영하는 나주정씨, 풍산홍씨, 하동정씨, 서흥김씨가 모여 사성강당이라는 현판을 쌍계정 내부에 걸었으며 대들보 밑에 무엇인가를 넣어두는 곳 같은 곳에 금안동계 문서를 보관하였던 곳이다.
(느티나무와 푸조나무)
쌍계정에는 400년을 산 푸조나무와 키 10m, 흉고 550cm의 400년을 산 느티나무가 있고 호랑가시나무 2그루와 은행나무가 어우러져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고 있다.
쌍계정 느티나무 아래에는 특이하게도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도 쌍계정이 지어졌을 당시부터 있었다면 문정공 정가신은 하인들까지도 알뜰하게 챙겼고 효율적으로 일을 시켰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수 많은 선비들이 쌍계정을 드나들며 시국을 논하고 시회를 열고 하다보면 술과 음식을 즉석에서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이때 필연적으로 제일 많이 필요한 것이 물을 현장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우물을 만든 것은 하인들의 노고를 크게 덜어 주었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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