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이야기 월계동 장고분
광주 월계동(첨단지구)에 있는 장고분은 영산강 상류의 평야를 끼고 있는 낮은 구릉지로 도시가 개발되기 전에는 월계리 장구촌마을 앞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광주 첨단산업단지 조성으로 인하여 지금은 시가지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1993년과 1995년 두 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월계동 장고분 역시 다른 장고분과 그 형태가 비슷하며, 장고분은 2기의 장고분이 꼬리를 물고 잇닿아 있는 형국인데 앞쪽 1호 고분이 뒤쪽 2호 고분보다 조금 더 크고 1호 고분은 일제강점기 때 도굴되면서 훼손된 것을 복원 하였다.
복원된 봉분의 전체 길이는 45.3미터이며 높이는 2.8미터에서 6.1미터며 분구 주위에 도랑이나 연못을 파 놓은 주호의 너비는 14.2미터에서 5.5미터와, 깊이는 1.5미터 내외이다.
2호 고분은 주변의 경작과 도굴로 많은 부분이 유실된 상태였으며, 발굴 당시 원부 정상에는 판석 일부가 노출되어 있기도 했다.
복원된 봉분은 1호 고분보다 조금 작으며 형태는 유사하나 도굴과 봉분의 유실로 인하여 석실에서는 철도자편, 토기편, 유리구슬이, 주호 시설에는 적갈색 원통형 토기 등이 파괴 된 채 출토되었다.
발달된 방부와 방패 현 주호, 크게 벌어진 나팔형 토기 등이 특징으로 옛 무덤 발달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광주시에서는 1994년 지방기념물 제20호로 지정하여 관리해 오고 있다
월계동 장고분은 영산강 상류의 충적평야를 낀 낮은 구릉지인 옛 월계리 장구촌(남양아파트와 라인1차아파트사이))에 있으며, 인근에 신창동 유적(사적 제375호)이 있다.
발달된 방부(方部)와 크게 벌어진 나팔형 토기 등이 특징으로 옛 무덤 발달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일본의 방패현 주호(周濠),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기원과 관련하여 고대 한일관계사를 밝히는데도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1호 장구분은 일제시대에 도굴되었으며 봉분은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동시에 판축 성토되었으며, 장축 방향은 원부가 동남동에 방부가 서북서에 있다.
널길이 있는 횡혈식(橫穴式) 석실로 원부의 한쪽에 치우쳐 원부와 함께 축조 되었으며, 석실의 방향은 널방이 동북동, 널길이 서남서에 있다.
석실벽은 할석(割石)을 벽돌처럼 쌓고 판석으로 천장을 덮었으며, 바닥은 큰 할석을 깐 다음 맨 위에 강자갈을 깔고 석관을 설치 하였고 석실의 크기는 널방 길이4.5m, 너비2.8m, 높이2.7m이며, 널길은 현길이 2.8m, 너비 1.4m, 높이 1.6m 내외이다.
석실 내부는 도굴되었으나 귀고리 1점, 철제 화살촉 1점, 토기편 등 약간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주호에는 적갈색 원통형 토기, 나팔형 토기, 유공광구호(有孔廣口壺) 등의 많은 토기들이 파괴된 채 출토되었다.
2호장고분은 경작과 도굴로 많은 부분이 유실되어 원부 정상에는 판석 일부가 노출되어 있었고, 봉분은 몇 개로 나누어 판축하였으며 방부를 원부에 붙여 축조하였고 장축 방향은 원부가 동쪽에, 방부가 서쪽에 있다.
횡혈식 석실로 원부와 동시에 축조되었으며, 장축 방향은 널방이 동남쪽, 널길이 서북쪽에 있으며, 석실벽은 할석을 벽돌처럼 쌓았으나 일부 장대석을 사용한 곳도 있고 바닥은 1겹의 판석을 깔았다.
석실의 크기는 널방 길이 3.8m, 너비 2.4m, 현 높이 1m내외이며 널길은 파괴되어 현 길이 2.5m, 너비1.5m만 남아 있다. 도굴과 봉분의 유실로 인하여 석실에서는 철도자편(鐵刀子片), 토기편, 유리 구슬만이 출토되었고 주호 시설에는 적갈색 원통형토기 등이 파괴된 채 출토되었다.
장고분은 영산강유역권에서 5~6세기 경에 조영된 고분의 대표적인 형태로 영산강 유역 주변에서 10여기가 발견되었으며, 일본의 대표적인 고분인 前方後圓墳의 형식으로 조영되어 있으며, 일본의 고분형식으로 조영된 長鼓墳이 영산강유역권유역권에서 출현된 것을 두고 학자들은 여러가지 견해를 제시하였고 무덤의 주인은 이지역의 재지세력권자나 일본(九州)에서 온 일본사람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당시 백제의 정치적인 상황과 연결시켜 설명하거나 구주지역의 정세와 관련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장고분은 영산간유역권 지역과 왜와의 관계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영산강유역의 당시 사회상, 영산강유역과 백제의 관계와도 깊게 관련되는 문제가 있다고 학자는 전하고 있다.
영산강유역권에서 장고분은 10여기가 확인되었으며 이 지역의 고분 중에서 가장 대형에 속하는 것으로 월계동 장고분은 원분에 방부가 연결된 형태로 분구의 모습에서 일본의 前方後圓墳과 관련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거나 측량조사된 것이 대부분 이어서 장고분에 대한 세부적인 파악은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장고분은 대체로 구릉 능선의 말단부에 위치하며 매장시설은 횡혈식석실이고 분구에서 段築은 확인되지 않지만 분구 중복에 葺石이 확인되기도 하였으며, 분구는 전체길이가 30~80m에 달하고,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형태적으로 유사한 전형적인 장고분들이 대부분이지만 영암 자라봉고분, 담양 고성리 월성산 1호분과 같이 방부가 미발달한 것도 있다.
영산강유역권의 장고분에 연결부가 있었음은 함평 신덕 1호분의 분구 중간에 있는 즙석부에도 연결부가 만들진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으며, 주구는 평면형태가 방패형인 것과 장고형인 것으로 구분되는데, 방패형은 주구 내곽선은 분구 기저부와 같은 장고형이지만 외곽선은 방패형을 띠는 것이고 장고형은 주구 내곽선과 외곽선이 모두 분구 기저부와 같이 장고형을 띠는 것이다.
방패형 주구는 광주 월계동 1․2호분과 명화동고분, 함평 표산고분에서 확인되었고 장고형 주구는 함평 신덕 1호분이 대표적이며 함평 장고산고분도 이러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林永珍․趙鎭先)
영산강유역권에서 장고분을 포함한 일본과 관련된 요소는 5세기 후엽~6세기 전반에 걸쳐있으며 광주를 포함한 영산강 서북부지역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장고분의 분구와 석실의 구조, 墳周土器로 보아 출현 시기의 장고분은 광주 월계동 1호분으로 추정되는데 석실은 일본 九州지역과 관련이 있지만 분구의 형태, 조영 시기를 반영하는 墳周木器 등은 大阪지역을 포함하는 近畿지역과도 관련이 상정된다.
이와 관련된 직접적인 문헌기록이 없어서 장고분의 출현 배경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으나, 三國史記, 日本書紀 등의 문헌기록과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5세기부터는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가 본격화되는데 백제가 외교의 일환으로 왕족을 일본에 파견하고 여러 기술자 집단을 보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본 九州 지역에서 출토되는 토기로 보아 호서와 호남지역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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