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깔크막의 우리동네 이야기

우리동네 이야기 배고픈다리

깔크막 2010. 2. 11. 08:38

 

우리동네 이야기 배고픈다리

 

배고픈다리는 무등산을 가는 길목의 학운동을 거쳐 가는 길에 있는데 학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기 때문에 학운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무등산 천재단에서 중머리재와 세인봉과 운소봉을 잇는 산자락에 있는 아주 조그만한 산동네 였으며(운림동), 증심사와 약사암 아래 골짜기에 몇 채의 집이 있었고 성촌, 신림, 동산,  무량, 숙실마을이 있었으나 자연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마을은 증심사지구 환경개선 사업으로 인하여 이제는 거의 없다. 

학동에서 증심사입구로 들어오는 길목에 배고픈다리가 있는데 옛날에는 이곳을 "선거리" 또는 "선관이"이라고 불렀으며,  지금은 홍림교(洪林橋)로 부르고 있다.

배고픈다리는 다리의 형태가 움푹 꺼져 있는 모양을 빗대어 부르는 이름이었으며, 어떤 이유에서 움푹 꺼진 다리를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배가 고프면 배가 쑥 들어간 모양과 비슷하여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다리를 만들 때 "백오푼"의 경비가 들어 갔다하여 "백오픈다리"라고 불렀는데 구전으로 전하다보니 나중에 배고픈다리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인터넷 이름 뚬벙님이  전하는 배고픈다리의 유래를 보면 임씨 성의 효자가 어머니의 병환을 낫게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약을 구하기 위해 뛰어 다니다가 겨울인데도 상서로운 무지개가 드리워진 곳을 보니 자라가 있어 그것을 약으로 사용하여 어머니의 병이 깨끗하게 나았다는 이야기가 암벽에 글로 새겨져 있었는데 근대에 홍림교(배고픈다리)를 수리하면서 없애버렸다는 이야기를 향토사학자 이백순선생의 입을 통하여 전하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경양방죽을 만든 "김방"이라는 사람이 무진골에 한발이 잦아 배고픔에 시달리는 것을 보다 못해 경양방죽 축조공사를 하고 물을 가두어야 하는데 삼년간이나 비가 오지 않아 배고파 쓰러지는 백성을 보다 못해  사흘 밤낮을 정성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본 백성이 김방의 건강을 염려하여 닭을 잡아 상에 올렸는데 그는 닭똥집만 먹고 나머지는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임금(세종대왕)이 낮잠을 자는데 닭들이 때로 몰려와 김방이 무등산에서 역적모의를 하고 수천명의 장정을 모아 놓고 군사훈련을 시킨다는 말을 듣고 금부도사에게 김방을 삼일 안에 잡아드리라고 명하여 금부도사가 배고픈다리 근처인 선거리에 도착하자 말과 사람이 땅에 붙어 한 발자국도 못가고 있었는데 다시 세종의 꿈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김방은 닭내장을 요리해 먹은 것은 사실이나 김방은 김제의 벽골제를 축조하고 지금은 경양방죽을 만들고 있으며, 나중에 증심사를 중수하고 오백나한을 조성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전하자 세종은 그때서야 자신의 우매함을 뉘우치자 어디선가에서 어명이라는 외침과 함께 말과 사람이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그때 관군들이 선 채로 이틀 밤낮을 지냈다고하여 "선관이" "선거리"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움직이지 못하고 배고픔에 시달렸다하여 "배고픈다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지금은 움푹 들어간 모습은 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