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깔크막의 우리동네 이야기

장성의 이척산성지과 삼성산성지

깔크막 2010. 1. 13. 23:02

이척산성지(利尺山城址)

 

장성읍 유탕리 유탕마을 불암산(이재)에 있으며, 이척산성은 수습 유물로 보아 삼국시대에 축성된 산성으로 보이며, 조선 초기에 폐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척산성은 불대산(불태산) 서쪽의 해발 500여m의 봉우리로 동·서·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남고북저형의 지형을 갖추고 있다.

성벽은 동·서의 두 구릉과 북쪽의 계곡의 상단부를 연결하여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내탁법에 의해 쌓았으나 기록에는 '불대산(불태산) 서쪽 기슭에 있는데 돌로 쌓았고 둘레 520척, 높이 3척으로 성안에는 우물 4개와 6개의 계곡이 있다고 되어있으나  지금은 퇴락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축성으로 나타나지만 현재 750m 정도의 토루가 잔존하고 있는데, 성돌이 파괴된인지, 축조 당시부터 토루로 쌓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석축의 길이는 650m로 전체 길이는 1,400m이며, 동문 서문 북문지는 남아 있고 기와와 토기편이 흩어져 있다.

이척산성에는 참나무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자라고 있으며, 계절에 따라 많은 야생화가 다투어 피고 남쪽으로는 소나무가 아름다운 산이다.

길가에서 제일 흔하게 볼 수 있는 야생화는 족두리풀이며, 온갖 새들이 노는 곳이며 산행길은 잘 다듬어져 있으며, 낭떠러지에는 부처손이 가득하고 멀이 용진산이 보인다.

한 여름에도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와 풀이 우거져 이곳에 들어가면 매우 시원하고 넓게 퍼진 평지의 녹색이 마음까지 편하게 하는 이척산성을 지나 삼성산 정상에 도착하면 이암정이 지어져 있고 전망이 매우 좋아 마음을 놓아버리고 쉬고 싶은 곳이다.

 

(이척산성(이재산성)의 전경

 

 

 

삼성산성지(三聖山城址)

 

진원면 진원리·선적리 삼성산에 있으며, 삼성산은 송사 기우만이 삼산재를 짓고 의병열전을 썼던 곳이 삼성산으로 표기하고 있어 불태산에 있다.
기록에 의하면, '돌로 쌓았으며 둘레 550척, 높이 7척으로 성안에 3개의 우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일제시대 조사 기록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진원리와 선적리에 소재한 산성으로 보고되어 있는데 '장성읍의 동남 2리 반에 있으며 산복부의 높은 곳을 점하고 있는 석축으로 둘레 약 600칸이다'고 조사되어 있으나 지금은 정확한 위치를 알수가 없다.

삼성산은 귀바위봉을 말하고 귀바위봉 정상(626m)에는 삼성산 이암정이 지어져 있으며 진원면 선적리 대절봉의 진원성과 연결되는 선상에 있으며 최근까지 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출입이 통제되었던 곳으로 자연의 모습이 그대로 있어 귀바위봉을 오르는 곳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계곡의 능선을 점령하고 있는 곳도 있으며, 대체적으로 식생은 매우 단순하고 오르는데는 급경사로 이루어져 있어 쉽게 오르기는 어렵다.

귀바위봉을 올라 불대산(불태산)으로 연결되는 곳은 큰재를 지나 껄떡재를 넘어 불대산(불태산) 능선으로 이어진다.

귀바위봉은 동쪽을 재외하고 모든 방향이 경사가 엄청 심하거나 낭떨어지가 있어 쉽게 접근하기가 어렵다.

귀바위봉(삼성산)북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이척산성(이재산성)과 이어지며 이 산을 불암산으로 부르고 있는데 불암산과 삼성산을 이어주는 이재에 위치하고 있다.

 

(삼성산의 귀바위 전경)

 

 

산성은 보통 형태에 따라서 테뫼식 산성과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나누는데, 테뫼식 산성은 산 정상를 중심축으로 하여 성벽을 축성한 것으로 마치 사발을 엎어 놓은 듯하다고 해서 발권식(鉢圈式) 산성으로 부르거나 떡시루에 흰 번(시루번)을 두른 것 같다고 해서 시루성, 또는 머리에 수건을 동여 맨 것 같다고 해서 머리띠식 산성이라고도 하며 산성의 규모가 대부분 작은 산성으로 김해의 분산성이나 부여의 증산성이 이에 속한다. 

포곡식 산성은 산기슭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정상부와 계곡을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성이 감싸도록 축성하여 그 규모가 보통은 매우 크며, 장성의 입암산성이나 담양의 금성산성이 이에 속하고 그밖에는 산성이 위치한 지형조건에 따라 고로봉형(栲栳峰形)· 산봉형(蒜峰形)· 사모형(紗帽形)· 마안형(馬鞍形) 등으로 나누기도 하나 이에 따른 실제적인 구분은 매우 어렵다.

또 다른 형태의 성이 있는데 산성과 평지성의 성격을 함께 갖춘 평산성(平山城)이 있으며 평산성은 평지에서부터 배후의 산등성이를 감싸고 축조한 것으로, 이러한 형태는 지형과 취락입지에 기인한 우리나라 성곽 특징에 속한다.

주로 국경지방의 변방읍성이 이에 속하며, 우리나라 대부분의 읍성이 이러한 성격을 보이고 있다.

산성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먼 곳을 바라다 볼 수 있다는 점이며, 멀리서 다가오는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산성은 공격하기는 어렵지만 방어하기는편하고 높은 곳에서 아래를 보면서 싸우기 때문에 위에서는 아래쪽의 행동이 다 관측 되지만 아래쪽에서는 산성 내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알기 어렵다.

따라서 산성을 공격하려면 방어하는 인력보다 최소한 10배 정도의 인력이 필요하게 되어 전력상 공격하는 쪽에서는 손실이 크고 산의 능선이나 계곡을 이어 성을 쌓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공격 당하기 쉬운 쪽은 튼튼하게 성곽을 만들었고 쉽게 침략하거나 공격을 하지 못하도록 축성하엿다. 

보통 산성은 성내에 물이 나는 곳이 많을 뿐만 아니라 농사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성내가 넓어 오랜 기간 동안 성을 지키고 있을 수 가 있어 장기전을 할 수가 있으며, 적은 수의 병력(인력)으로도 장기간 버티며 적의 식량이 떨어지고 지치기를 기다리거나 적의 배후를 급습하여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어 장기전은 물론 여러가지 전술을 이용할 수가 있어 매우 유리한 위치에서 적과 싸울 수가 있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산성은 적을 방어하기 쉬운 천혜의 요충지를 많이 제공하고 있으며, 산성이 가지고 있는 전략적인 힘은 병력이나 무기 보다도 훨씬 크다.

 

송사 기우만 선생은 1846년(헌종12년)에 태어나 1916년에 졸하였으며, 한말에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바탕으로 의병을 이끌었던 의병장으로 본관은 행주이고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로 호남의 유림의 거장이었던  정진(正鎭)의 손자로 할아버지에 이어 문유로 추대되었다.

1881년(고종 18년) 김평묵(金平默)과 함께 정부의 행정개혁을 주장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호남소수(湖南疏首)라고 불렀으며,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유생들이 농민군에 가담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1895년 나주에 동학당 토평비를 세울 때 비문을 지었다.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1896년 2월 유인석(柳麟錫)의 격문이 이르자 3월에 광주향교에 들어가 거사를 논했으며, 기삼연(奇參衍)이 장성의 의병을 이끌고 합류하자 광주의 광산관(光山館)을 본영으로 삼고 의병을 일으켰으나 고종이 신기선(申箕善) 등을 선유사(宣諭使)로 보내어 해산할 것을 명하자 이에 응했다.
5월에 다시 기병했으나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가 1908년 순천 조계산의 암자에서 재기를 노리던 중 고종의 강제퇴위 소식을 듣고 은둔했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으며, 1926년 고산서원에 배향되었으며, 1980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