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이야기 나주 불회사 석장승(石長栍)
석장승은 우리 조상들의 원시신앙의 대상으로 장승, 솟대, 입석, 돌탑, 마을의 정자나무를 신목으로, 남성의 성기모양을 닮은 남근석, 거대한 바위, 크고 오래산 나무를 신성하게 다루었고 그 근처의 일정한 구역을 성스러운 공간으로 구획하고 개인의 염원과 공동체의 안정을 비는 수단으로 발전하였으며,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발달한 유목과 어업과 농경문화의 소산으로 발달하였다고 보고 있다.
장승은 씨족사회의 발달로 수호신앙으로 이용되었으며 보통은 씨족이나 마을의 안정, 개인의 염원을 바라게 된 대상으로 발달하면서 제정일치 시기에는 지배이념의 표상으로서 기능을 하다가 삼국 시대에는 중앙 집권적 국가 기틀이 되었고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장승은 민간 신앙의 주체였는데 조선시대에 들어 사대부 사회의 통치 이념인 유교가 도덕적 규범의 성격이 강함에 따라 생산, 죽음이나 질병, 고통 등의 문제와 연관되어 장승 신앙이 부활 할 소지가 생겼고, 궁중에서도 일정한역활을 무속신앙인 금 장군, 갑 장군이라 불리는 세화의 등장이나 용과 호랑이 그림의 유행이 유교의 도덕적 규범에 대항하는 증거로 볼 수가 있다.
외래 신앙이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전래의 민속신앙과의 충돌이 커진 불교, 도교, 유교, 등의 통치 이대올로기가 체계화 됨에 따라 불교와는 전혀 무관한 장승이 사찰에 등장하게 되었는데 장승이 우리 조상들의 신앙으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오늘날 사찰에 가면 집의 현판만 보아도 알 수가 있고 절의 탱화나 벽화를 보면 유교와 도교에서 신앙의 대상이었던 상징들이 불교의 상징과 같이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불교가 당시의 모든 신앙세력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지배층 문화에서 소외된 불교, 도교가 민간 신앙과 결합하게 되었고 그 결과 신석기시대 이후에 발달한 민속신앙의 한 종류로 장승신앙이 발달하게 되었고 조선 후기의 새로운 장승문화에서 그 이름이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방어대장군, 지서대장군, 상원주 장군, 하원당 장군 등으로 붙여진 것으로 볼 수가 있고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면면히 이어온 장승은 16∼17세기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개인은 물론 공동체 문화의 중심에서 마을 단위의 모든 행사의 중심에 서게 되고 민속신앙의 역활을 하게된다.
장승의 종류는 돌로 만든 석장승과 나무로 만든 목장승이 전국에 분포하고 있으며, 목장승은 솟대(蘇塗), 석장승은 입석(立石)에서 유래하였다고하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한 기록이 없어 기원에 대하여서는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장승을 지칭하는 이름도 여러 가지인데, 조선시대에는 한자로 '후(堠)', '장생(長栍)', '장승(長丞, 張丞長承,)' 등으로 썼고, 지방에 따라 장승· 장성· 벅수· 법수· 당산할아버지· 수살목 등의 이름이 있다.
장승은 세운 목적에 따라 지역간의 경계표시, 이정표,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였는데 길가나 마을 경계에 있는 장승을 기점으로 한 사방의 주요 마을 및 거리를 표시하였고, 수호신으로 세운 장승에는 마을의 신앙 대상으로서 주로 액병(厄病)을 빌었다.
장승은 흉년이나 재앙, 유행병으로 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마을수호신앙으로, 풍수지리적인 사상에 의해 허한 방위에 세워 사방의 기운을 맞추는 역활, 크게는 국가의 연장과 군왕의 장생을 기원하는 산천비보의 역활, 고을이나 마을의 지맥이나 수구가 허한 곳을 다스리기 위해 세운 비보의 역활, 불법수호를 위해 사찰의 입구에 세워 경내의 존엄함을 강조하는 역활, 농경과 수렵생활로 부족한 먹거리와 땔감을 얻기 위한 경계의 표시역활, 이정표및 방두의 노신을 겸한 역활, 성문이나 마을 입구에 세워 역병이나 재앙의 침입을 막는 역활, 개인적인 것으로 장승의 코를 베어다 삶아 그 물을 먹으면 득남한다는 믿음과 먹을 것의 풍요와 질병퇴치를 기원하는 역활을 하였고 잘되거나 좋은 일이 있어도 장승덕이라며 감사하고 나눌 줄도 알았다.
장승은 보통 남녀로 쌍을 이루며, 남상(男像)은 머리에 관모를 쓰고 전면에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상원대장군(上元大將軍)이라 새겨 있으며, 여상(女像)은 관이 없고 전면에 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하원대장군(下元大將軍)'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장승은 장소에 따라 채색· 형상· 크기 등이 다르나 모양이 괴엄(魁嚴)하고 해학적인 모습을 갖고 있는 점은 일치하고 장승에 쓰는 장군 이름에는 민속적인 신명(神名)이 등장하는데 동쪽에 있는 장승에는 동방청제축귀장군(東方靑帝逐鬼將軍), 서쪽에는 서방백제축귀장군(西方白帝逐鬼將軍), 남쪽에는 남방적제축귀장군(南方赤帝逐鬼將軍), 북쪽에는 북방흑제축귀장군(北方黑帝逐鬼將軍)이라고 써서 세워, 축귀하는 민간 신앙의 성격을 나타내기도 하면서 장승을 서낭당· 산신당· 솟대와 동등한 신앙으로 인정하며, 액운이 들었을 때나 질병이 전염되었을 때에는 제사를 지냈다.
나주 불회사의 석장승은 중요민속자료11호로 보호받고 있으며, 불회사 입구의 경내에 위치하고 있고, 사찰의 경계를 표시하는 역활로 장승이 세워져 있는 부분부터 경내에 해당하니 몸가짐을 바로하라는 의미가 있다.
불회사의 석장승은 오른쪽이 남장승, 왼쪽이 여장승으로 하반신이 땅에 묻혀 있었고 남장승은 하원당장군은 얼굴 조각선이 깊고 인상적이며 입 주위의 치아가 1개씩 노출되어있는 모습이다.
머리 가운데가 솟았고 커다란 돌기형 코선이 다른 장승과 다른 큰 특징이며, 원래는 아래 하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누군가가 추가로 획을 새겨 넣는 바람에 바를 정자의 모습을 하게 되었으며, 여장승인 주장군은 얼굴이 매우 온화하고 인상이 부드럽고 전체적인 모습은 평면적이다.
불회사의 석장승은 강희 58년인 1719년을 전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는 이유는 불회사 근처의 운흥사지에 있는 운흥사 석장승의 조각수법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동 시대에 석장승이 세워진 것으로 보고있다.
하원당장군의 당자는 사당으로 가는 길을 뜻하고 주장군의 주자는 꼬불꼬불한 길을 뜻한다.
장승은 통일신라 때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절로 통하는 길목이나 마을 어귀에 세웠는데, 이는 유목이나 농경 또는 수렵과 어업을 하는 실생활에서 신앙적으로 정신적지주의 역활을 하였다.
서울 장승백이, 전주의 장승백이라는 마을이나 길이 있는데 마을과 마을의 거리를 나타내기 위한 목적의 장승이 서 있던 곳의 지명이 되었으며, 또 다른 전국에 널려 있는 장승백이라는 지명은 장승을 깍아 땅에 박아 두었다하여 장승박이라 했던 것이 변화하여 장승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조선조 태종 14년(1414년)에 경복궁 앞의 도로원표를 기점으로 10리(4km)마다 소후, 30리(12km)마다 대후를 만들되 후에는 반드시 장승을 세워 장승 아래쪽에 방향과 사방으로 통하는 거리와 지명을 새겨넣었으며, 삼국시대에 천연두가 중국을 통해 들어온 이래 전국을 휩쓸며 많은 인명을 앗아가자 백성들은 손님, 마마라는 존칭을 써서 천연두 귀신을 달래 온 곳으로 다시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천연두가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게 험상궂은 얼굴의 장승을 마을 어귀에 세워두기도 했으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장승들 중에는 천연두가 가장 창궐했던 18세기에 세운 것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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