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깔크막의 우리동네 이야기

우리동네 이야기 진천사(眞泉祠)

깔크막 2009. 5. 16. 12:55

진곡마을회관이 저 멀리 불태산을 등지고  고즈녘한 여름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진곡동 가작마을을 가려면 호남고속도로 광산I/C나 1번국도를 통하여 비아에서 816번 도로를 타고 임곡방향으로 가다보면 하남공단을 막 지나 오른편에 폐교된 하남북초등학교가 보이는데 그곳에서 약 300m정도를 직진하여 왼쪽으로 조그만 입석돌(흑색)에 진곡이라는 표지석이 있으며 시내버스승강장이  건물형태로 지어져 있다.

진곡마을의 주산인 팔랑산(팔왕산)이 멀리 불태산을 어깨 넘어로 보여주고(하) 하얀 하우스가 꽃을 키우는 곳이며 그곳으로 진곡마을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으며 초입에 오성재와 후암정이 있고 마을회관 앞에는 새로지은 정자가 만남의광장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으며 그곳에서 50여미터를 직진하면 가작마을로 가는 씨멘트포장도로(가작길)인 농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작은 산을 한바퀴 돌면 오른쪽에 진천사가 있으나 지금은 유허비만 있고 그곳에 새로만든 유허비와 그 전에 만들었던 유허비만 있다.

안타깝게도 사우의 건설연대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찾을 수가 없었다.

 

 

 
진천사(眞泉祠)는 의기(義氣)의 대학자 박광일(朴光一)을 배향하는 사우로 박광일의 본관은 순천. 호는 손재(遜齋)이며 1654년 9월 12일 구 하남면 진곡리에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낸 우헌 박상현(寓軒 朴尙玄)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벼슬이나 출세에 뜻이 없는 맑은 학자의 집안에 태어나 학문에만 전념하여 일찌기 예경(禮經 : 예법을 적은 책)에 깊이 통하였고 태극음양(太極陰陽)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나이 23세때 아버지와 친교(親交)가 있는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선생을 유배지(流配地 : 귀향가 있는 곳)로 찾아가서 성현(聖賢 : 지식과 덕이 가장 뛰어난 사람)의 길을 배웠는데 우암은 선생을 가리켜 치수불루(置水不漏 : 물을 두 어도 새지 않는다. 즉 치밀하고 반듯하다)라고 극찬하였다. 선생의 문명(文名 : 글을 잘하여 드러난 명성)은 조정에도 알려져서 주자대전(朱子大全 : 주자학의 총판)을 바로잡는데 참여하였는데 우암선생은 주역(고대 중국의 철학서)과 고경(古經 : 옛경서를 바르게 한후 임금앞에서 신(臣)의 제자중 박광일이 특히 역학(易學 : 주역의 괘를 풀어서 만물의 변화를 설명하는 학문)에 조예가 깊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송우암(宋尤庵)은 주자(朱子)를 신봉(信奉 : 믿고 반듦)하였고 선생은 우암을 후주자(後朱子 : 뒷날의 주자)라 높이고 정성으로 따랐다. 어느때 어사(御史 : 임금의 명으로 특별한 사명을 띄고 지방에 파견된 관리) 권상유(權商游)가 이곳을 지나가는 길에 선생을 찾아 세상을 다스리는 가장 중요한 방법을 물었다.

공정(公正 : 공평하고 올바름)이면 능사료(能事了 : 모든 것이 잘된다)라고 선생이 대답하니 권어사가 “공(公)이란 참으로 좋은 것이지만 거기에는 명(明)이 함께해야 하지요.” 하니 선생이 공자(公者 : 관리)가 無私 (사가없고 공정함)하면 밝음(明)이 자생(自生 : 저절로 생김) 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 얼마나 해절(該切 : 적절)한 해답인가-. 선생은 1701년에 내시교관(內侍敎官 : 내관을 가르치는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곧이어 익위사시직(翊衛司侍直 : 왕세자를 호위하는 벼슬)이 주어졌지만 끝내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705년 모친상을 치른후 지리산 문수동(智異山文殊洞)에 들어가 살면서 선생의 선성(先聲 : 전부터 널리 알려진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문인 학자들과 강론(講論 : 학술이나 도의를 이야기함)으로 날을 보내기 4년 가족들과 수토(水土 : 물과 기후)가 맞지 않아 광주로 돌아왔다. 그때 산거(山居 : 산속에서 삶)에서 지은 시 한수를 골라 그때의 선생의 심정을 살펴본다.

元來經謂不同源 淸濁何言本一原 秦地風塵雲有影 商山氷雪月無痕
潛龍自是承天意 跡丞焉能感主恩 此義於今誰與自 離騷吟罷羅寒門

우연히 읊음은 원래가 경수(涇水 : 중국에 있는 강, 濁流)와 위수(渭水 : 淸流)는 그 근원이 같지 않은데 맑음과 흐림이 어찌하여 근원이 같을 손가. 진나라 땅에 풍진(風塵 : 전쟁 북새통)이 있어도 구름은 역시 그림자가 있고 상산 땅에 얼음과 눈이 얼어 붙으니 달빛이 간곳없네. 잠룡(潛龍 : 묻혀있는 영웅)은 보시 하늘 뜻을 이어 받았는데. 못된 돼지(미련한 신하)가 어찌 임금의 은총을 느끼겠는가. 이뜻을 지금 누구와 함께 의논할 거나? 이소경(離騷經 : 초나라 屈原이 억울함을 적은 시)을 읽어가다 창문을 닫아 버렸다. 여기서 선생의 우국충정(憂國衷情 : 나라걱정하는 마음)과 높은 기개(氣槪 : 꿋꿋한 기운)를 엿볼수 있다. 선생은 1713년에 왕자사부(王子師傅 : 왕자를 가르치는 관리)를 제수 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717년에 시강원 자의(侍講院 諮議 : 임금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벼슬)로 불렸지만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은 젊은 30대에 기사사화(己巳士禍 : 조선 19대왕 숙종이 장희빈이 낳은 아들(경종)을 세자로 삼으러 함에 송우암 등 서인(西人)이 이에 반대하자 이들을 귀양 보내고 죽인 사건)등이 일어난 난세(亂世)가 싫어 모든 벼슬을 마다하고 평생을 시골에 살면서 학문과 도의(道義 : 사람이 마땅히 행하여야할 도덕과 의리)를 넓히는데 힘썼다. 저서로는 생음생양설(生陰生陽說), 중정인의주정설(中正仁義主靜說) 등 12권의 문집(文集)이 있고 뒷날 호남의 유림(儒林 : 유도를 닦는 학자들)이 선생의 학덕(學德 : 학문과 덕행)과 절의(節義 : 맑은 절개)를 기려 광주 진천사(眞泉祠)와 강진 남강사(南康祠)에 제향하고 있다. (광산문화원 전문발췌)

진천사가 있는 진곡동 가작마을은 이곳에서는 가재기라고 모두가 부르고 있으며 진곡마을에서 분리된 작은 마을로 어렸을 때 "산골"을 주으러 다녔던 백두산 또는 백토산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고령토를 인연으로 붙혀진 이름이라고 하며 1640년 순천박씨 진천공(眞泉公)이 맑은 샘물과 좋은 지세를 따라 학문을 닦기 위해 집을 짓고 옮겨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실제로 동네 앞에는 작은 샘이 있는데 마르지 않고 맛이좋고 여름에는 시원하기가 얼음과 같았으나 지금은 사용되지 않고 있다.

진천공이 태어난 진곡마을의 유래를 보면 예천(醴泉)의 흐름의 근원이었고 그 규성(奎星)의 정기(精氣)가 한집안에 모여 여러 성덕(名德)들이 특출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광주군 거치면 신안리 일부와 소고룡동(召古龍面)의 일부를 합하여 진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조 중종때 순천박씨 박이이공(朴而恭公)이 나주에서 옮겨와 살면서 생성된 마을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