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도(金鰲島) 비렁(벼랑)길 알고 떠나기
금오도(金鰲島) 비렁(벼랑)길 알고 떠나기
금오도(金鰲島) 비렁(벼랑)길이 있는 여수시 남면(南面)은 화태도(禾太島), 대,소두라도(大,小斗羅島), 나발도(羅發島), 대,소횡간도(大,小橫干島), 금오도(金鰲島), 안도(安島), 연도(鳶島), 대,소부도(大,小釜島)를 비롯하여 여러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 금오열도(金鰲列島)라고 부르고 그 중 제일 큰 섬인 금오도(金鰲島)의 해안을 따라 급경사와 낭떠러지를 이루는 해식애(海蝕崖 Sea cliff)와 해안단구(海岸段丘 Coastal terrace)를 따라 비렁(벼랑)길이 조성되어 있다.
금오도(金鰲島)에는 사철 푸른 소나무를 비롯하여 많은 나무가 울창하여 멀리서 보면 검게 보인다하여 “거무섬”이라고 불렀고, 1872년 발행된 “순천방답진(順天防踏鎭)”의 지도에는 “거마도”라고 표시되어 있다.
19세기 후반의 순천부사 김윤식(金允植)이 지은 시를 통해서 금오도를 살펴보면 바다는 가만히 있는 날이 없고, 초목은 빽빽하고 늘 안개비에 나무는 하늘에 닿았다라고 표현했으며, 섬에 사는 동물이나 곤충으로는 개구리, 방개, 박쥐, 사슴, 두견새, 모기, 검은 조개가 있었으며, 전복을 따는 사람이 있었고 나무가 많고 사슴이 뛰어 논다고 했으며, 모기는 지독하다고 하여 당시 금오도의 자연환경(自然環境)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금오도(金鰲島)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유적으로는 신석기시대의 주거유적인 여천(汝泉)의 조개더미 유적에서 발굴된 굵은 줄무늬, 가는줄무늬, 세모점줄무늬, 겹아가리토기는 남해안에서 출토한 신석기 시대의 유물과 비슷한 특징을 보였으며, 제주 북촌의 유적과 같은 세모점줄무늬토기가 이곳에서 출토되어 문화의 전파경로를 알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2000~3500년(B.C15~10세기) 전의 청동기유적은 두모리(두모리)의 고인돌에서 찾을 수 있으며, 온전하게 들어난 것은 2기가 있고 7기는 땅 속에 묻혀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바닷길(海路)를 통해 왜구(일본)가 침입하였고 소나무를 기르던 봉산(封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성종~연산군시대에 특히 왜구의 침입이 매우 잦았으며, 이것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목(目)이라는 것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결국 왜구의 침입을 조사하고 토벌하는 군인인 수토장(搜討將)을 배치하게 되었고 이순신장군은 난중일기를 통해 금오도의 정세를 살피고 황장봉산(黃腸封山)의 부정을 조사하기 위해 군관 50명을 대동한 송일성(宋日成)을 파견했다고 기록했다.
황장봉산(黃腸封山)이란 궁궐을 짓거나 임금의 널(棺)을 짜거나 판옥선(板屋船)과 같은 전선(戰船)을 만드는 주요 나무를 기르고 가꾸는 산으로 국가가 관리를 하는 산을 말하고 금오도의 주요 수종은 소나무였다.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수령(守領)이나 만호(萬戶)가 감독은 물론 배양(培養)관리를 맡아서 하는 산을 말하고 금오도에서는 황장봉산의 나무를 보호할 목적으로 사람들을 섬에서 내보내기도 하였으며, 내수사(內需司), 종부사(宗簿司), 영빈궁(寧嬪宮)에서 서로 소유하여 세금을 거두려고 했다.
황장목(黃腸木)은 영읍(營邑) 또는 진읍(鎭邑)의 전선(戰船), 병선(兵船), 통신사의 도해선(渡海船)으로 썼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종2년 1865년 9월의 태풍으로 소나무가 모두 쓰러져 이 풍락송(風落松)으로 경복궁을 재건할 때 사용하였으며 이때 금오도의 황장봉산의 기능도 한께 잃고 말았다.
당시 금오도에는 1725년 조선 영조 때 6개의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890년부터 금오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는 기록은 황장봉산의 기능을 잃은 금오도에 사람을 다시 살도록 허락했다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
1885년 이전까지 금오도는 황장봉산으로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나 이후 명성황후(민씨)가 살고 있는 명례궁에 하사되어 금오도를 사슴목장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여수시에서는 상징적인 의미로 2004년 6월에 사슴 20마리를 풀어 역사성과 상징성을 동시에 만족 할 수 있도록 했다.
매봉산(382m)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화태도(禾太島)는 “여의도서”에서 수태도(愁太島)라고 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의 상황을 방답첨사진(突山島)에 알려주는 기능을 했기 때문에 췻띠섬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마을 뒷산인 노적산에 군량미를 쌓아 놓은 것처럼 위장하여 적을 속였기 때문에 벼 이삭 수(穗)자를 써서 수태(穗太) 또는 수태(愁太)라고 했다가 벼 화(禾)자를 써서 지금은 화태도(禾太島)라고 한다.
화태도(禾太島)에서 조선시대 뽕나무에 기생하여 자라는 겨우살이(桑寄生)을 생산하여 전라좌수사 이홍립이 상기생(桑寄生)을 1.5근 정도를 채취하여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순천방답진(順天防踏鎭)에서는 지금의 화태도(禾太島)인 수태도(穗太島)를 파태도(波太島)라 잘못 표기하였다.
화태도(禾太島)에는 군사용 말 조련장과 기마장이 있었으며 말발굽이 찍혀있다는 마족(馬足)바위, 고양이 머리처럼 생긴 묘두(猫頭)바위, 반달처럼 생겨 달밭기미(月田)가 있으며, 섬의 생김새가 콩을 닮아 큰 섬(大豆), 작은 섬(小豆)으로 부르다가 한자식으로 부르는 섬 대,소두라도(大,小斗羅島)가 있다.
나발도(羅發島)는 섬의 생김새가 나팔을 닮아 부르게 되었고 섬에는 260년이 된 사철나무를 비롯하여 후박나무, 팽나무로 가득한 당산 숲을 자랑하고 있다.
대,소횡간도(大,小橫干島)를 순 우리말로 큰빗깐이, 작은 빗깐이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섬의 생김새에 따라 벌거벗은 모습으로 경사진(비스듬) 섬이라는 뜻이다.
횡간도(橫干島)에서 궁중에 올리는 진상품이 있었는데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따르면 신경태(信經苔)라고 했으며, 매산태와 거의 비슷하지만 조금 거칠고 짧고 맛은 담백하고 서식하는 조건과 채취 시기는 같다.
횡간도(橫干島)에는 미군의 사격으로 민간인이 학살된 두룩여사건이 일어 난 곳이며, 해식동굴을 과녁 삼아 활을 쏘며 놀았다는 “놀이청(청노리)이 있으며, 관우(關羽)를 신격화하여 관왕에게 동제가 아닌 사문중(私門中)의 성격이 강한 당제를 지내고 있다.
매봉산을 대대산, 대부산이라고 부르는 전망대에서 멀리 있는 여러 섬들을 구경하고 40분 정도 걸으면 갑자기 넓은 평지가 나오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절터라고 한다.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도사가 이곳에서 지팡이를 두드려 평지를 만든 다음 절을 짓고 불경을 드렸고 상좌아이가 공양 쌀을 씻다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자 도사는 다시 지팡이를 두드려 산을 무너지게 하여 절의 흔적을 없애고 떠나 버렸고 상좌아이가 쌀을 씻던 자리가 쌀뜨물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으니 찾아보는 것도 산행의 묘미를 살리는 것이다.
이 절터는 송광사라는 절로 고려시대 보조국사(지눌)가 창건했다고 하는 전설에 따르면 화순 모후산(母侯山)에서 좋은 절터를 찾기 위해 나무로 깍은 새를 날려 보냈는데 한 마리는 순천 송광사 국사전 터에, 한 마리는 고흥 금산면 송광암에, 나머지 한 마리는 금오도에 앉았고 그 자리에 고려 명종 25년 1195년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송광사라고 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며 새가 앉은 자리에 세운 3개의 절을 삼송광(三松廣)이라고 한다.
송광사의 절터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 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세울 때 함구미(옛 용두)의 소나무를 이용했으며 이때 비사리나무 한 그루를 순천 송광사로 가져가 구시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순천 송광사에 있는 아주 오래된 구시는 남원에서 가져온 느티나무로 만든 것이라고 하니 절터 근처나 함구미(含九味)에서 혹시나 있을 느티나무를 찾아보는 것도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즐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함구미 옆에는 송고(松高,솔고지)라는 마을이 있는데 키가 큰 소나무가 울창하였다는 것을 마을 이름에서 금방 알 수가 있으며 이 마을은 1879년 소라면 달천에 살던 사람이 조정의 명을 받고 사슴사냥을 왔다 경치에 반해 주저앉아 살게 되었다고 하며, 소나무가 우거져 솔지라 부르다 송고(松高)로 변했다고 한다.
남면의 금오도에서 유일하게 당제가 이어지고 있는데 1903년 호환을 당한 이후부터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당제를 지내게 되었으며, 상당은 대대산(大代山=산의 형세가 장대하다하여 나무꾼이 부른 이름, 매봉산, 대부산) 중턱에 있는 숲 속의 바위이고 하당은 마을 옆 소나무가 당산나무이며, 헌식제는 마을 앞 선황이라고 한다.
비렁길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함구미(含九味)는 한구미라고도 부르는데 매봉산 산줄기 끝부분이 용머리를 닮았다하여 용두라고 부르다 바닷가의 해식애가 기암절벽을 이루어 아홉 개의 골짜기 모양을 나타내고 있어 함구미(含九味 한구미)라고 부른다.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고 마시면 잔병은 물론 사내아이를 못 나는 사람이 사내아이도 낳을 수도 있다는 기적의 샘이 있는 함구미(含九味)에서 부족한 물을 채우고 비렁길을 걷기 시작하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을 한 바위가 있는데 어떤 주민이 여의주에 해당하는 바위를 빼내어 바다로 굴려 버렸다고 하였다.
그해 마을의 젊은이들이 차례로 죽어 이것은 여의주를 훼손한 죄 값이라고 생각한 주민들이 제사를 지내어 달래고 나자 마을이 평온을 되찾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용두(龍頭)바위가 있다.
마을 어른들의 이야기를 따르면 이곳의 절벽에서 배를 깔고 업어져 상어를 잡았던 재미있던 시절이 있었다며 허허 웃는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신선들이 경치가 아름다워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신선이 실제로 머문 듯 한 집터가 있어 흥미진진한 신선대가 있다.
조금 지나다 보면 미역널방이 있는데 주민들이 채취한 미역을 널어 말렸다하여 부르게 되었고, 수달피벼랑은 넓은 바위에 수달이 자주 모여 놀았다 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금오도가 봉산이었을 때 경차관(敬差官) 산하 포수였던 박정안(1885년)이 처음 들어와 살았다하여 첫개(初浦)라고 불렀던 두포(斗浦)의 초입에 **불무골이 있는데 경복궁을 재건 할 때 나무를 베어내는 연장을 만들었던 대장간(풀무간)이 있었던 곳이라서 불무골이란 이름이 생겼으나 그만 마을안길을 넓히면서 흔적은 사라지고 없으나 그때 사용하였던 옹달샘만 덩그러니 황장봉산의 역사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
옥녀봉의 전설에 의하면 옥녀봉에 살던 선녀인 옥녀가 상거리(桑)에서 딴 뽕잎을 이용해 누에를 쳤는데 누에고치가 말(斗=10升)로 잴 정도로 많이 생산되었으며, 당시의 상거래 방식은 물물교환이었으므로 모하(母賀)마을에서 생산된 곡식과 교환하기 위해 좀 더 큰 도량형(斗)이 필요해 두포(斗浦)라고 했다고 하나 모하(母賀)마을의 유래를 보면 목화(木花)가 잘 되었던 곳으로 “목화동(木花洞)”이라고 하였고 어머니가 옷을 만들기 위해 하는 일이 길쌈이어서 누에고치와 목화가 상장하는 모(母)자와 옷이 귀하던 시절에 자식에게 의복을 입혀줌이 경사스러워 하(賀)자를 써 모하(母賀)라고 불렀다는 것을 보면 두포마을의 유래에서 모하마을이 곡창지대였다는 것으로 두포를 설명하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억지스러운 점이 있다.
금오도의 풍수지리학적으로 옥녀봉(251m)은 금오도에 있는 대부분의 마을 형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산으로 신성시하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산이며, 우학리의 주산으로 다사랑산의 정상에 신랑봉바위(다사랑바위)가 건너편 옥녀봉을 마주하고 있다.
1860년 안도(경신년 대화재) 화재 때 사람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우실마을의 뒷산이 옥녀봉인데 전해 내려오는 전설로는 하늘에 사는 선녀 4명이 내려와 놀다 3명은 올라가고 1명은 인간과 인연을 맺어 이곳에 살게 되었다.
선녀의 이름이 옥녀(玉女)였기에 옥녀봉이라고 했으며 인간과 인연을 맺고 살고 있는 것을 안 옥황상제가 서로 만나지 못하도록 남자는 다사랑산에 바위로 옥녀는 옥녀봉의 바위로 만들어 마주보고 애가 타도록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옥녀봉에서 나무를 베는 것은 옥녀의 치마를 벗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옥녀가 노(怒)하여 재앙을 내린다하여 이 산에서는 나무를 베지 않는다고 전해져 내려 온 다고 한다.(황장봉산)
우학(牛鶴)리를 지나 진작지라고도 하는 장지를 지나 바다가 깊어 짚은개라는 예쁜 우리말 이름을 갖고 있는 심포(深浦)을 지나 섬의 형태가 기러기 모양 같다하여 기러기 안(雁)자를 써 안도(雁島)라고 하였는데 하늘에서 보면 한반도 모습을 보여주고 1860년 경신대화재로 인해 100가구 중 1가구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던 대참사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섬으로 섬 중앙에는 상산(上山 207m)의 정상에 봉수대의 흔적이 있어 왜구의 침략과 근처 상황을 알리는 요망소로 추정된다고 한다.
심포마을의 요망소와 연락을 취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섬은 동도와 서도로 구성되어 있고, 남쪽은 사주(沙州)로 인해 연결되어 있으며 태풍에 안전한 내륙호수룰 만들어 배가 내륙까지 들어 갈 수가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하나의 무덤에 2구의 인골이 하늘을 보고 나란하게 놓여있으며 조가비로 만든 팔찌를 착용한 모습을 한 앙와신전장(仰臥伸展葬)을 처음으로 확인하고 6천 년 전 장례제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신석기시대의 팔찌 착용은 성인식문화와 연결되며 일본 구주지역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 준다.
안도 앞에 있는 섬을 형태가 가마솥 같다하여 부도(釜島)라고 부르고 지역에서는 “가마도”라고 부른다.
해안의 대부분이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를 이루고 오랜 침식작용 기암절벽의 절경을 이루고 있는 연도는 소리도라 불리는데 섬의 모양이 소리개가 새를 차고 나는 형상이므로 소리섬 또는 소리도라고 부른다.
동물이나 사물의 형태을 닮은 빼어난 자연경관이 많은데, 동물 형상을 하고 있는 코끼리바위, 물개바위, 하늘담, 뱀대가리와 코굴 바위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연발하게 한다.
금오도의 진면목을 다 감상하려면 검바위에서 시작하여 매봉산을 지나 함구미에 내리는 산행과 함구미에서 장지까지 이루어진 1차 2차 생태 체험길인 비렁길을 걷고 자전거로 연도를 둘러보고 우학리를 거쳐 여천에서 송고와 함구미에 이르는 길을 달리고 해상에서 한 바퀴 죽 둘러보는 것이 금오도를 온전하게 볼 수 있다.
비렁길에서 해안단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용두(용두), 굴등, 신선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해안단구(海岸段丘 Coastal terrace)란 바다 물속에 있던 기반암(基般巖), 해식대(海蝕臺), 퇴적지형이 해수면의 하강 또는 지반 융기로 현재의 수면보다 높은 위치의 육지에 남아있는 지형을 말 한다.
금오도에서는 해안침식, 퇴적지형, 해식애(海蝕崖), 씨아치(Sea arch)등 다양한 침식지형을 볼 수가 있으며, 해식애에 의한 해식동굴로는 코굴과 보물로 지정된 솔팽이굴, 싸아치(Sea arch)형상으로는 코끼리바위가 볼거리로 해상관광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굴등 전망대를 내려 해식애(海蝕崖)가 매우 발달하여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는 직포(織浦, 보대)는 1835년 화정면 개도에서 2가구가 몰래 들어와(황장봉산) 정착하면서 심었다는 등천의 노송 30여 그루는 방풍림으로 역할을 다하고 있으며 지금도 독야청청하고 있다.
함구미와 두포마을의 담은 돌담으로 매우 높게 시설되어 있는데 이것은 태풍으로 인한 바닷물이 날아오는 것과 강한 바람으로부터 집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생태 체험길에서 요즘 보기 드믄 초분을 볼 수 있는데 초분(草墳)이란 우리나라 장례방식의 하나로 일종의 풍장에 속하나 남서해안을 따라 해안이나 섬에서 송장을 짚이나 풀로 덮어 두었다가 육탈이 된 후(3~10년) 뼈를 골라 시루에 쪄서 땅에 묻는 장례방식의 하나이다.
금오도 비렁길의 1구간과 2구간을 체험하면서 온갖 야생초와 나무는 물론 남부지방에서 자라는 난대수종을 깊이 있게 찾아 볼 수가 있으며 남부해안 지방이 아니면 볼 수가 없는 참나무 종류와 해안에 자라는 야생화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를 더하는 여행이 된다.
*. 벼랑길--낭떠러지의 험한 언덕, 물가의 위험스런 절벽=벼루, 이런 곳에 난 길을 벼룻길, 높은벼랑=나픈별, 돌벼랑=독별, 기타 사투리로는 빌(별)에서 나온 벼랑으로 베랑, 베랑체, 베렝이, 비렁이, 비량, 벼락, 베락체, 비럭, 비룩, 비슷한 말로 비탈, 비탁, 비알등이 있다.
**.불무골--불무골짜기, 골=고을의 준말, 불무=풀무의 옛말, 풀무의 사투리.
***.여수시청의 자료와 남면의 자료를 발췌 또는 인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