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소요산(444m) 가는 길
고창 소요산(444m) 가는 길
소요산은 고창의 진산인 방장산의 맥을 서쪽으로 들어 올리며 해안에 힘차게 솟아오른 산으로 비록 해발 444m에 불과한 낮은 산이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는 산으로 해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내륙의 산과 비교하면 매우 가파르고 높은 산이다.
소요산은 고창의 젖줄인 인천강(주진강)의 하류와 장연강을 사이로 선운산의 경수봉과 마주하고 있으며, 다른 이름으로는 형제봉이라고도 부르고 문장가를 많이 배출한다는 문필봉이라고도 부르는데 실제로 미당 서정주선생과 인촌 김성수선생, 보천교의 차경석을 비롯하여 만장봉이 목으로 넘어오는 꿈을 꾸고 탄생한 전봉준까지 모두 소요산 자락에서 태어났다.
소요산은 내장산을 지나 순창새재의 530봉을 거쳐 나누어진 영산기맥으로 입암산, 방장산을 지나 인천강을 따라가다 곰소만에 빠진다.
정상의 북쪽에는 곰소만과 죽도, 서해의 내변산 줄기인 선운산, 동쪽의 방장산, 입암산과 함께 소요산 정상에 오르면 해변의 풍경이 시야 멀리 무궁무진하게 펼쳐지고 안개라도 끼는 날이면 운무 가득한 소요산과 서해바다가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가 크기를 갸름할 수 없는 화폭을 자랑한다.
소요산은 백제의 문화와 역사를 품은 듯 만 듯 별다른 문화재를 가두지는 못했지만 선운산 일원의 봉우리들을 겹겹으로 둘러 친 모습에서 준령을 연상케 할 만금 절경을 자랑하고 있다.
산행을 다니면서 산의 관상을 본다는 “조용헌”선생은 소요산을 보고 바위가 품고 있는 성분이 유황(硫黃)이 많이 들어 있어 화기가 강하고 지혜를 늘리는데 좋은 산이므로 고승들이 기도처로 삼는다고 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한 때 소요산 자락에는 많은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산행의 시작은 연기마을 입구에서 현호색과 보춘화, 사스레피나무, 진달래가 전망대로 가는 길을 안내하였고 바윗길과 능선을 따라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소나무가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약간은 지루할 것 같은 산행 길에 봄꽃으로는 지천인 길마가지나무와 제비꽃이 가득하고 사자봉(350봉)을 넘으니 용산재가 오른쪽에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고 있는데 시야를 험하게 장식하는 채석장이 요란한 기차소리를 내며 질마재를 넘어가는 것 같았다.
임도를 따라 소요사에서 연기사터로 내리니 오죽(烏竹)이 연기저수지가 생기기 전에는 이곳이 마을이었다는 듯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고 머위가 한창 꽃을 피우며 무릇의 무성한 잎들 사이에서 빨간 꽃을 성급하게 보는 것 같았다.
소요사(逍遙寺)는 건너편 사자봉(350봉)을 마주보는 용혈로 지세가 강한 지기를 품고 있으며 절의 창건은 백제 위덕왕(554∼597년)때 고승이던 소요대사(逍遙大師)에 의해 개창되었다고 하는 설로 소요대사는 소요사(逍遙寺)에서 큰 가르침을 깨닫고, 이름을 얻은 곳이라는 의미에서 산 이름을 소요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소요사의 또 다른 창건설은 지리산 화엄사와 천은사 및 연곡사를 창건했다고 하는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연기사緣起寺)를 창건하면서 지금의 소요사(逍遙寺) 자리에 작은 암자를 짓고 수도했다고 하는 설이 있으나 연기조사(緣起祖師)의 이력이 잘 알려지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가 없고 대체로 신라 경덕왕(742∼764년) 때의 활동한 고승으로 추정된다.
연기조사는 고창 흥덕 출신으로 도교로 출가하여 명산을 찾아 고행했다는 설과, 인도에서 왔다는 설 등이 있으며, 경덕왕 때 제작된 신라 “화엄경”인 사경(寫經)이 발견됨으로써 그의 행적이 확인되었다.
이 사경의 발문에 의하면 그가 754년(경덕왕 13년) 8월 사경을 조성하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 2월에 완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소요사는 도선국사가 수행을 하여 큰 깨달음을 얻었다하여 보림이라 칭하기도 하고 진묵(震默)스님과 소요(逍遙)스님이 이곳에서 수행을 함에 따라 두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자하는 스님과 불도들로 가득해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전부 소실되었고 1644년(인조 22년) 허기(虛機)가 중건한 대웅전은 조선말까지 존재하였다고는 하나 소요사(逍遙寺)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1950년 6·25전쟁 때 불에 탄 것을 현학(玄鶴)스님이 복원 했으며 대웅전과 칠성각·산신각 등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3칸으로 내부에 문수보살좌상과 천안의 위왕사에서 옮겨온 높이 60cm 크기의 중종(中鐘)이 하나 있으며, 칠성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1998년에 제작된 신중탱화가 있다.
유물로는 도선국사의 부도와 근래에 세운 삼창공적비, 헌답기념비를 비롯하여 칠성각과 산신각 사이에 있는 서해용왕지위비(西海龍王之位碑)가 있다.
대웅전 앞과 옆에 나잇살을 자랑하는 유주가 자라는 느티나무가 모두 4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소요사의 역사를 모두 알고 있음직했다.
그 외 볼거리로는 북쪽에 취은처사 황세기, 귀암 황재중 부자가 독서하던 구인암명옥대, 유선대가 있고 근처에 병바위와 효자바위가 있다.
연기저수지 하단부에 위치한 효자바위는 조선 인조 무자년(1648) 김하익이 16세의 나이 때 모친의 병을 낫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雪水(눈물)로 글씨를 썼는데 김하익의 효에 감동해 스님이 구해주고 호랑이가 태워다 주었다는 효자로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그때 김하익이 눈물로 쓴 허백당 3글자는 200년이 지났어도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상에서 바라보면 영모정 뒤 인천강변에 병을 거꾸로 세운 것 같은 바위가 있는데 이바위가 병바위로 선인봉의 선인이 반암 뒤 채일봉에 채일을 치고 잔치를 하다 술에 몹시 취하여 자다가 잠결에 소반을 걷어차서 술병이 거꾸로 섰는데 이것이 병바위가 되었고 반암에 있던 소반이 굴러 영모정 뒤 지금의 자리에 놓이니 소반 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새롭게 조성된 이야기가 있는 길이 시작되는 심원면 연천마을에서 화산마을, 사등마을을 거쳐 하전마을로 이어지는 14킬로미터의 질마재길, 고인돌길(8km), 풍천장어길(10km), 소금길(13km)이 있는데, 검단 소금 전시관 앞의 갯벌은 백제시대에 소금(화염)을 채취했던 곳이다.
미당 서정주선생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있는 질마재 외갓집이야기와 공동징벌문화를 통해 성(性)문화를 바로 잡고자했던 우물이야기를 비롯하여 인촌김성수 선생의 생가 터와 매장문화의 진수를 볼 수 있는 고인돌무덤도 여유 있게 둘러보며 여행의 대미를 장식해도 좋다.
천연기념물인 수동리 팽나무(수령 400년)를 보며 우리조상들의 기원(祈願)과 공동체 문화의 역사가 깃든 당산나무로 역할을 하면서 신앙으로 승화하여 경이롭고 신적인 존재로 대우를 받으면서 아주 오래된 동네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당산나무인 팽나무가 있는 곳은 간척지를 매립하기 전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 배를 매었다는 이야기를 뒤로 하며 여행을 마무리 하는 것도 좋다.
산행코스 : 연기마을--전망대--헬기장--연기재--소요사--소요산--연기사터--연기저수지--연기마을(산행시간 :4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