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 이야기
목화 이야기
목화는 아욱과의 섬유작물로 재배하고 있는 한해살이 풀로 기원전 800년 전 부터 인도에서 재배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중국 원나라에서 반출을 철저하게 막아 전해지지 못하다가 고려시대 공민왕 때 문익점선생에 의해 몰래 붓통에 씨 10개를 숨겨 들여와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장인인 장천익선생과 함께 처음 심었다.
문익점선생이 심었던 목화씨는 재배에 실패하고 장인이 재배에 성공하여 사월리가 목화시배지가 되었으며 목화문화에 예술을 접목한 휴식공간을 경상남도와 산청군에서조성하고 있다.
목화는 8~9월에 꽃이 피는데 해가 뜨기 전에는 엷은 노란색으로 피었다가 저녁 무렵에는 약간의 연분홍색으로 변하고 다래라고 부르는 열매가 맺히며, 열매가 가을에 4조각으로 분리되면서 그 속에서 하얀 솜이 부풀어 오르고 까만 씨가 각 방마다 1개씩 들어 있다.
목화를 우리지방에서는 미영, 명, 면마, 초면, 면화라고 부르고 솜은 목화의 열매에서 씨를 감싸고 있는 부분으로 미영이라고 부르면서 솜으로 옷감을 짜면 면, 명베, 무명베, 미영베라고 부른다.
목화가 우리나라에서 재배되기 시작하고 옷감으로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우리의 의복문화는 획기적으로 발달하여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가 있었으며 또한 면은 값이 싸고 튼튼하고 실용적일 뿐만 아니라 보온성과 흡수성이 강하고 옷감으로의 감촉이 좋아 속옷으로도 아주 적당하였지만 치명적인 약점도 있었는데 탄력성이 없고 구김이 잘 가고 특히 산에 매우 약 하다는 것이다.
목화를 문익점선생이 들여오고 장천익선생이 재배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솜으로 실을 뽑아내는 기술이 없어 옷감으로 활용을 못 하고 있다가 문익점의 손자가 물레를 만들어 가늘게 실을 뽑아 면포를 짜는데 성공하게 된다.
목화와 함께 마음까지 따뜻하게 해 준 섬유식물로는 어저귀, 닥나무, 모시풀, 뽕나무, 삼(마)등으로 옷감을 만들어 사람들이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한 것은(숲이나 나무를 이용하여)사계가 뚜렷하고 일교차가 심한 우리나라의 자연환경이 섬유문화가 발달하게 한 가지 이유가 아니었을까?. 우리 조상들은 추위를 견디고 더위로부터 피하기 위해 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처음에는 나뭇잎이나 풀이 옷의 역할을 했지만 나무나 풀에서 섬유를 뽑아 옷감으로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삼이나 어저귀로 만든 삼베, 모시풀로 만든 모시베는 해당 식물의 하얀껍질을 섬유로 가늘게 뽑아 옷을 만들어 입었다.
삼베나 모시베는 수분을 잘 흡수하고 배출하는 특성은 물론 공기가 잘 통하고 자외선을 차단하는 효과와 곰팡이 억제, 항균, 항독의 작용이 있으며 내구성이 견고하여 빛깔이 고와 여름옷으로는 최고로 좋았으나 일교차가 심한 봄, 가을, 겨울에는 보온성이 떨어져 옷감으로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목화인데 목화의 열매를 솜으로 가공하여 만든 옷으로 따뜻하고 옷 안의 열을 밖으로 쉽게 방출을 하지 못해 체온을 유지하려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천과 천 사이에 솜을 적당하게 깔고 솜이 몰리지 않도록 두 천과 솜을 함께 누벼서 바지나 저고리를 만들어 입게 되면서 추위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가 있었다.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실로 만든 명주베는 신분이 높거나 부유한 사람들이 옷을 해 입었지만 삼베, 모시베, 무명베로 만든 옷은 손질하기가 쉽고 따뜻하여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즐겨 입었다.
이처럼 따뜻하고 손질이 쉽고 저렴하여 누구나 즐겨 입는 모습을 보고 조선시대의 대학자였던 조식선생은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처음으로 시작하여 중국 사람들을 먹여 살린 후직선생과 같다”라며 목화를 들여 온 문익점선생을 추앙했다.
목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의 의복문화를 송두리째 바꿔 버렸으나 면(솜)으로 만든 옷에는 치명적인 충이었던 “이”가 살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곳곳에서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아무데서나 박박 긁으며 이를 잡아내 죽이거나 양지 쪽에 앉아 허리춤을(골마리) 까고 이를 잡는 풍경도 모자라 나중에는 학교에서 발진티프스를 막기 위해 농약인 디디티(DDT)까지 뿌리기에 이르렀다.
물론 목화로 인해서 이나 벼룩, 빈대가 사람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목화로 만든 무명(면)옷은 틈새가 많고 따뜻하고 적당하게 습도가 유지되어 이들이 살기가 좋은 환경이 만들어 졌기 때문에 엄청난 속도로 퍼졌지만 나일론이 나오면서 그들은 없어져버렸으나 근래에는 어린아이의 머리에 사는 이가 극성을 부린다고 한다.
'이"가 등장했으니 숲에가면 층층으로 된 우산을 펼쳐든 모습을 한 이나무가 있는데 이나무의 줄기에 피목처럼 생긴 것이 서캐('이'의 알. 보통은 '이'를 닮았다고 함))를 닮아 이나무라고 했다고 하는 나무가 남부지방에 있는데 열매를 가을부터 겨울까지 빨갛게 매달고 눈이라도 많이 오는 날이면 숲의 모든 새들이 모여 잔치를 여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나무가 있다.
목화를 가리켜 그리스의 역사학자였던 헤로도토스는 “양털보다 훨씬 아름다운 털을 맺는 불가사의한 나무”라고 극찬했고 속담 중에 “꽃은 목화가 제일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겉은 보잘 것 없지만 실속이 있다. 라는 뜻으로 인용할 때 사용한다.
목화가 소재가 된 영화였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번영의 중심에 상업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목화가 상업의 중심에 있어 풍요로움이 가득한 신개척지에서 목화와 목화씨 기름을 엄청나게 생산하고 판매하여 부를 일구게 된다.
미국의 남부지방의 목화가 그 지방의 특산물를 대표하면서 시장에 엄청나게 돈이 많아짐에 따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교만이라는 것이 결국은 목화밭에서 나오게 되므로써 목화가 한 시대를 풍요롭게는 해 줄 수 있었지만 이로 인하여 인간의 마음이 황폐해가는 과정을 다룬 영화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도 목화를 소재로 한 유행가 중에 하사와병장이 부른 목화밭이라는 노래가 있다.
“우리 처음 만난 곳도 목화밭이라네. 우리 처음 사랑 한 것도 목화 밭 이라네.
밤하늘에 별을 보며 사랑을 약속하던 곳. 그 옛날 목화 밭 목화 밭.“(이하 생략)으로 꽤나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가사를 볼 수가 있으며 (생략) ”호리 술병 둘러메고 무명적삼 너울대며 경허가 흘러가네 . 목화밭 김매다가 오줌 누는 여인네야. 장삼 끝 이는 바람에 네 속곳 다 젖는다.“라는 다소 서민적이나 노골적인 표현의 시도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목화는 우리에게 친숙한 존재로 늘 우리 곁에 있었고 일찍이 “네덜란드의 식물학자 마르셀 디케(Marcel Dicke)는 식물은 초식성 곤충의 공격을 받으면 그 공격자는 다른 곤충을 유인하는 페놀화합물인 방향성화합물을 분비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침에 들어있는 화학물질이 식물의 경보체계를 발동시키는데 ‘목화’와 같은 식물에서도 관찰되었다고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목화는 솜을 이용하는 것 이외에도 목화의 열매가 익기 전에 생으로 따 속살을 먹으면 풍부한 수분과 약간 달콤하여 1960년대 까지만 해도 시골의 목화밭 옆을 지나가게 되면 풋 열매를 따먹고는 했는데 이때 어른들은 “목화열매를 한 해에한 되를 따 먹으면 문둥이(한센병)가 된다.”면서 간식거리가 전혀 없던 시절에도 어린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고 훔쳐 먹는다는 죄책감이 들지 않도록 어린이들을 배려했다.
당시에 어린이였던 나는 목화의 연한 열매를 따먹으면서 처음에는 자신있게 목화밭에 들어가 열매를 따 먹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되가 넘었을까봐 쭈볏쭈볏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가장 무섭고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의 모습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멸시를 받고 있던 문둥이(한센병)가 된다며 경고를 확실하게 하면서 적당한 선에서 어린아이들과 타협하여 목화의 중요성을 은근하게 알려주었던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움을 볼 수가 있었던 것이 목화였다.
목화는 솜으로의 역할이 아주 컸지만 목화씨에서 착유한 기름은 등잔기름이나 공업용으로 활용하면서 그 가치가 매우 높아 석유가 절대 부족하였던 한 시절을 훌륭하게 구가하였던 식물이었다.
솜이나 씨를 빼내고 난 찌꺼기는 버섯을 재배하는 재배지로 활용되고 있으나 지금은 전량 외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목화의 뿌리는 염색원료나 약용으로 사용하여 버릴 것이 없으며 곡성에서는 목화를 심고 가꾸어 관광 상품으로 활용하면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관광 상품으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폐의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서 목화(면)로 화폐를 만들고 있으며, 누나들이 시집갈 때 빠지지 않고 새 솜으로 만든 솜이불을 혼수로 가져갔으며, 신부는 혼인이 결정되고 나면 여러 가지 혼수를 준비하는데 시부모(媤父母)를 위하여 이불과 요를 각각 1채와 베개 2개를 준비한다.
이불 홑청은 명주베나 공단(=비단 貢緞)으로 하고 안창은 무명베를 쓰고 속에는 목화솜을 두툼하게 넣고 만들었다.
신부 측에서 혼수의 대부분을 부담하는 경우에도 신부집이 경제적으로 빈곤하여 혼수를 부담하기 힘든 경우에 신부 집에서 날받이를 보내면 신랑집에서는 이불솜으로 '미영'(목화)과 쌀, 이불감 등을 보내 신부집이 혼사로 인해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배려했다.
또 다른 풍습으로는 우리지방에서는 소 여물주기를 통해 아주 오래 전에는 정월 보름날 아침 일찍 소에게 밥과 나물을 차려 주며 무엇을 먼저 먹는가에 따라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점치기도 했다.
소가 밥을 먼저 먹으면 그해 농사가 풍년이 들고, 나물을 먹으면 흉년이 들긴 하나 목화(木花)나 야채, 과일 등은 풍작을 이룬다면서 이날에는 외양간 앞에다 밥과 떡을 차려놓고 소가 언제나 사고없이 일을 잘 하기를 빌기도 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목화도 1960년 대에 들어서면서 석유화학 제품인 나일론이 섬유로 급부상하면서 목화를 비롯하여 삼, 모시풀, 뽕나무, 어저귀도 섬유작물로 가치를 잃었으나 근래에 들어서면서 곡성이나 산청군에서는 목화를 관광 산업화하여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삼베, 모시베, 면등이 친환경적인 자연제품으로 인정받아 각광을 받으면서 제2의 전성시대를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