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크막 2010. 7. 4. 09:57

모시풀 이야기

 

모시풀은 쐐기풀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모시풀속으로 우리 나라에는 모시풀, 왜모시풀, 섬모시풀, 왕모시풀, 개모시풀, 긴잎모시풀, 좀깨잎나무, 거북꼬리등이 자라고 있다.
여러해살이풀로 키는 1~2미터까지 자라며 근경은 목질로 땅 속에서 옆으로 뻗고 줄기는 둥글고 잔털이 빽빽하게 있으며 잎은  짙은 녹색으로 어긋나며
잎자루는 길고 넓은 난형으로 잎의 뒷면은 솜털이 밀생하여 흰색으로 보이고 꽃은 암수가 한 그루에 달리며 7~8월에 피는데 수꽃은 황백색으로 줄기 밑에 달리고 암꽃은 연녹색으로 줄기 윗부분에 달린다.

번식방법으로는 실생의 방법을 사용하면 발아율도 낮고 묘가 고르게 자라지 않기 때문에 별로 사용하지 않고 꺾꽃이(흡지나 세절흡지) 포기나누기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심는방법으로는 밀식하면 좋으며 한 번 심으면 땅속줄기가 자라 매년 새순이 나와 자라기 때문에 관리만 잘 해주면 오래 살고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는 1~3번 정도 수확 할 수가 있다.

모시풀은 습기가 많고 따뜻한 지방에서 잘 자라는데 동남아지방이 원산으로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에 자라고 있으며 이집트에서는 7,000년 전에 사용되었고 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1950년대까지 우리나라 상류층의 여름용 고급 옷감으로 사랑을 받다 다양한 옷감이 생산되면서 생산이 어렵고 힘이 들뿐만 아니라 옷으로 입었을 때도 관리하기가 복잡하고 일 손이 많아 자연스럽게 도태되었다가 근래에 이르러 다시 여름 옷감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고 있다.

모시풀의 다른 이름은 자라는 곳과 이용방법에 따라 다르게 부르기도 하였는데 청지백초, 천면총, 야저마, 은저, 천명정, 원마, 선마, 백저마, 산마, 홍저마, 모시, 모시풀, 남모시풀, 야마, 청마 등으로 부른다. 

    

 

모시풀의 속 껍질로 만든 실로 짠 옷감을 저마포, 저포라고 불렀으며, 삼국지, 후한서(後漢書) 등의 기록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삼한시대 때 부터 마에 관련된 직물을 재배하여 이용하였으며, 삼국시대 때는 직물을 짜는 기술이 매우 발달하여, 신라 제48대 경문왕(景文王 861~874년) 때는 모시가 해외 수출품의 하나로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저마, 백저포, 십이승백저포, 극세저포, 상저포, 예단백저포, 생저, 백세저, 장저, 청양저, 한산저등의 기록이 있으며, 세모시는 충청도와 전라도 해안지방에서 계속 생산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저포칠처라 하여 한산, 서천, 비인, 남포 등이 명산지로 이름을 날렸고 이 중 한산지방의 모시는 오늘날까지 모시의 명성을 알리며 지역 특산품으로 자리매김하여 고가에 모시제품이 판매되고 있다.

모시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노동방법인 길쌈은 부녀자들이 가정에서 삼, 모시, 명주(누에고치), 무명(목화)등으로 옷감을 만드는 과정을 일컫는 말이며 길쌈을 통해 만들어진 직물은 농가의 주요 소득원이 되었고 추위나 더위로 부터 우리의 몸을 보호해주는 역활을 했으며 화폐의 대용으로 쓰이기도 하였는데 고구려 때는 견포(絹布)로 세금을 부과한 기록이 있으며, 포백(布帛)을 화폐로 삼은 기록이 나타나고 조선시대에도 포(布)가 화폐로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모시섬유는 순백색이고 비단 같은 광택이 나며 내수력(耐水力)과 내구력(耐久力)이 강하여 여름철 옷감으로 많이 사용하고 커튼, 책상보, 장식용품등으로 사용되고 모기장, 낚시줄, 천막, 밧줄등을 만든다. 

 

 

모시풀에 대한 추억으로는 모시풀을 어렸을 때는 모싯대라고 듣고 자랐으며 추석에는 언제나 모싯잎을 삶아 찬물에 우려내고 송편을 만들면 그 향기가 일품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다른 지방에서 또는 이웃들은 모시풀이 없었던 관계로 쑥으로 송편을 만들었으나 다행하게도 우리집에는 모시풀이 있어 쑥을 채취하러 다니는 번거러움도 없었고 손 쉽게 집에서 자라는 모시풀을 이용 하였다.

솔잎을 깔고 찐 송편과는 맛에서는 비교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연하고 맛이 있으며 추석에 만드는 송편을 다른 지역에선는 쑥을 넣어 만든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집은 아주 오래전인 할머니의 할머니 그 이전부터 모시풀 잎으로 송편이나 인절미를 만들어 먹었다.

쑥으로 만든 떡은 가끔은 입 속에 쑥 찌거기가 남아 이물감을 느꼈는데, 모시송편이나 떡은 맛있고 부드럽고 향기 또한 그윽해 고향의 정이 듬뿍 느껴진다.

아직은 어머니가 살아 계셔서 모시송편을 맛나게 먹을 수 있지만 얼마나 더 먹을 수 있을련지 괜히 가슴이 찡해 진다.

여름이 지나갈 무렵에 모시풀을 낫으로 배어 가지와 잎을 제거하고 줄기의 가운데 쯤을 뚝 분지르면 겉에는 껍질(수피)과 함께 안 쪽의 껍질도 벗겨지는데 아주 잘 벗겨진다.

이 껍질을 한 줌 정도로 가지런하게 묶어 삶는 다음 물에 담가 놓고 모시칼이라고 부르는 칼로 나무 도마 위에 올려 놓고 살짝 누르면서 겉에 붙어 있는 껍질(흑피)을 굵어내면 하얀 속 껍질만 남는다.

이것을 삶고 우려 내기를 몇 번 하면 더 하얗게 변하는데, 어머니의 무릎과 이빨로 잇고 끊기를 계속하면 기다란 모시실이 만들어진다.

물레라는 도구로 아주 길게 이어 붙인 모시실을  일정 길이로 잘라 넓게 편 다음에 풀을 발라 불을 피우고 말린 다음 배틀에 올려 날줄을 풀어 가면서 북통에 담겨진 씨줄을  좌우로 욺겨 가면서 모시 옷감을 완성한다.

이 옷감으로 모시 적삼이나 바지 이불등을 만들어 사용하면 여름에는 통풍이 아주 잘 되고 땀을 흡수하여 시원한 여름을 날 수가 있다.

그러나 모시 옷감을 만드는 과정이 워낙 복잡하고 중노동이 되어 요즘은 만드는 과정을 쉽게 볼 수 없으나 이 모시 옷감이 특화되어 있는 한산이나 명인이 있는 나주 같은 곳에 가면 구경을 할 수가 있지 않을까 한다.

이렇게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옷감인 관계로 워낙 비싸 서민들은 그나마 입거나 이불을 만들어 덮는다는 것은 사치에 불과하고 조선시대 때에는 서민과 상류층 모두가 모시옷을 입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상류층을 재외하고는 모시옷이나 이불, 침대보등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처럼 모시는 동북아의 의류문화에 크게 이바지한 식물로 대마와 목화와 더불어 한 시대를 구가했던 식물로 옷만 만드는 식물이 아니고 밧줄이나 그물 같은 생활용품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