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례(婚禮)
혼례(婚禮)
혼례란 성인이 된 남녀가 결합, 성혼하는 의례이다.
우리나라 국민은 혼례를 치뤄야만 완전한 인간으로 대접받게 되는데 실례로 죽음을 당한 뒤 상, 제례의식 절차에 따라 의례실행 여부도 혼인의례를 중시했다. 과거 혼례는 육례에 따라 납채, 문명, 납길, 납징, 청기, 친영의 의례에 따랐지만 고려 중기부터 문명, 납길의 예가 생략되고 조선시대 주자가례에 나오는 의혼, 납채, 납폐, 친영의 사례편람에 따라 혼례 절차를 지켜오고 있다.
(1) 의혼(議婚)
혼담을 진행시켜 결정하고 혼사결정 이후 양가가 여러 가지 문서를 교환하여 혼인을 진행시켜 나가는 과정을 의혼이라 한다.
혼령(婚齡)은 일정치 않지만 남자는 15∼16세, 여자는 16∼17세가 일반적이다. 양반의 집에서는 비교적 조혼(早婚)하는 경향이 있어서 14∼18세가 되면 혼인을 하며 여자의 나이가 1∼2세 많은 경향이 있다. 민간에서는 약간 늦어서 20세까지 혼례를 치루나 20세가 넘어지면 늦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남자가 혼비(婚費)의 일정분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으면 26∼7세까지 늦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민간에서는 남자의 나이가 여자보다 많은 경향이 있다.
혼인의 결정은 부모, 특히 아버지가 주도적으로 한다. 정혼(定婚)하는 방법에는 첫째, 양가의 부모끼리 결정하는 경우가 있다. 양가의 부모가 서로 뜻이 맞으면 부모들끼리 자식의 혼인을 결정하는데, 주로 아버지의 의사에 따라 결정된다. 둘째, 일가친척 또는 같은 마을 사람들이 중매를 서는 경우다. 혼인을 결정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친척이나 마을 사람들은 서로 어울릴만한 대상이 있으면 자진하여 중매를 선다. 중매는 인간이 하는 일 중 좋은 일에 해당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평생에 두 번 이상은 중매해서 혼인을 성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 중매장이의 주선에 따라 혼인을 결정하는 경우가 있다. 중매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은 없지만 활동적이고 수완이 좋은 사람들이 중매를 자주 선다. 또 도부장수나 박물장수들이 중매를 서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새우젓, 조기, 고등어, 실, 바늘, 포목 등을 가지고 다니면서 행상인으로 민간에서는 여러 가지 정보를 전하고 중매를 서기도 한다.
혼담이 거론되면서 부모들은 상대방의 집에 대하여 알아 보아 혼인의 여부를 결정한다. 대상자를 선택하는 조건은 집안에 따라 다르나 양반집에서는 첫째로 가문을 보며 궁합을 가리는 등 여러 가지 사실들을 확인하면서 혼담에 임하며, 민간에서는 중매장이의 조정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고려되는 조건들은 성씨와 반상을 가리는 것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조부모가 생존한 다복한 집을 으뜸으로 치며 가급적이면 마을 내의 혼인은 꺼리는 경향이 있다.
구체적인 조건들을 나열하면, 여자의 경우는 남자측의 집안에 대하여 첫째, 가문의 내력을 중시한다. 즉 서손(庶孫)은 아닌가, 요절(夭折)하는 집안은 아닌가, 집안에 수익사(水溺死)하거나 목매거나 호식(虎食)을 당하는 등 악사(惡死)하는 집안은 아닌가, 집안에 폐병, 나병 등 나쁜 질병은 없는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집안인가를 살펴본다. 둘째, 인품과 행실을 살펴 본다. 이때는 당사자 뿐만 아니라 시부모의 행실까지도 본다. 셋째, 당사자가 건강하며 인물은 어떤가를 살피고, 넷째, 경제력은 어느 정도인가를 살핀다.
남자의 경우는 여자측의 가문보다는 당사자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 남자의 경우와 같은 사항들이 고려되면서 아울러 행실이 정숙하고 길쌈과 바느질을 잘하면 좋은 신부감으로 생각했다. 특히 민간에서는 길쌈은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생산수단이었기 때문에 길쌈을 잘 하는 쳐녀는 좋은 신부감으로 평가된다. 이에 합당한 처녀가 있으면 가문이 기울거나 경제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더라도 남자측에서 혼비(婚費)를 부담하고 사가는 경우가 많았다.
적절한 혼처가 나타나서 위의 사항에 합당하면 선을 보게 된다. 선은 중매장이를 통해서 보는데, 중매장이는 남·녀의 구분이 없이 누구나 중매할 수 있으며 흔히 '중매장이' 또는 '중신애비'라고 부른다.
청사(請事)가 있으면 양가에서는 가족들이 모여서 의논하여 상대방이 혼인에 적합한가를 논의한다. 이 과정에서 양가의 부모들은 상대방과 그 집안에 대하여 탐색한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의 친척이 과객(過客)으로 가장하여 상대방의 마을에 가서 신랑 또는 신부될 사람의 사람됨과 집안의 내력을 알아 본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상대방이 마음에 들면 사주보는 이에게 의뢰하여 궁합을 보고 궁합이 맞으면 중매장이를 통해 혼의 성사 여부를 타진한다. 제보자들의 말에 의하면 민간에서는 중매장이가 믿을만 하면 그 말만을 전적으로 믿고 혼인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느 동네에 과년한 딸을 가진 부모가 있어서 마땅한 혼처를 구하던 차에 친한 친구가 중매를 서겠다고 나섰다. 그 친구는 신랑될 사람의 가문과 형편을 자세히 소개한 뒤에 '아무것도 숭이 없는디-그저 먼 것이 숭이제'라고 말했다. 그러자 처녀의 아버지는 신랑될 사람의 가문이나 인품이 그만하면 되었고, 먼 것이야 오히려 좋지 무엇이 험이 되겠는가 하고 혼인을 결정하여 혼례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혼례식에 나타난 신랑은 체구는 멀정한데 앞을 못보는 장님이었다. 신부의 아버지가 중매를 선 친구에게 왜 장님이란 사실을 숨겼느냐고 다그쳤다. 그러자 친구는 '아 이사람아, 자네는 먼 것은 괜찮다고 안했는가'하고 답변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민간에서는 중매장이의 말만을 믿고 혼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양반집에서 선을 보러 다니기도 했고 민간에서도 시대가 변함에 따라 선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상대방의 선을 보러 다녔으며 어머니까지 동행하게 된 것은 중년부터의 일이라고 한다.
앞의 사항들 외에도 민간에서는 남자측이 여자측의 혼비를 대줘야 하기 때문에 가난한 집에서는 자식을 장가보내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하혼(下婚)을 하는 경우, 즉 양반집 자제가 평민이나 상민의 규수와 혼인하는 경우에는 여자편에서 많은 혼비를 부담했으며 시집올 때는 많은 지참금을 가져왔다.
(2) 납채(納采)
정혼하면 신랑집에서 정혼서와 사주단자를 신부집에 보내는 의례가 납채이다.
(3) 사성(四星)
의혼(議婚)이 원만하게 이루어져서 혼인하기로 결정되면 남자측에서 사성을 보낸다. 사성이란 사주를 적은 것으로 사주단자(四柱單子)라고도 한다. 사성을 보낸다함은 신랑의 부모가 정식으로 혼인을 청하는 의식이다. 즉 사성을 보내는 뜻은 천간(天干), 지간(支干)에 의하여 궁합 등 앞으로의 길흉을 보아 혼인을 결정하는데 자료를 삼고 택일하는데 참고하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 이미 의혼할 때 서로 사주를 알아서 비교해 본 후에 허혼(許婚)하므로 형식을 갖추는 절차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일단 사성을 받고 나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그 혼인을 취소할 수 없다. 혼인의 뜻이 없으면 사성 받기를 거절하여야 한다.
사성을 쓰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한지를 다섯겹 또는 일곱겹 접은 다음 가운데에 신랑의 간지를 쓴다. 양식은 다음과 같다
위의 형식으로 써서 사성보(四星褓)에 싸서 중매장이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보낼 때도 반드시 손이 없는 날을 가려서 보낸다. 사성보의 크기는 가로 45cm, 세로 45cm 정도이며 재료는 청색과 붉은 색의 얇은 망사비단으로 만들며 한쪽에 긴 끈을 달아서 돌려 묶는다.
사성은 중매장이를 통해 가져 갈 날을 미리 통고한 다음 중매장이가 가져가는 것이 일반적이며 양반댁에서는 하인이 가져가기도 한다.
사성이 오면 신부댁에서는 집안 어른들을 모셔놓고 혼주가 정중하게 받는다. 구체적으로 받는 절차는 다음과 같다. 사성을 가져오면 혼주가 큰방에서 받아 상위에 올려놓은 다음 개봉하거나 신부의 어머니가 치마로 싸서 쌀독에 넣어 두었다가 다음날 꺼내 보는 경우도 있다.
(4) 날받이와 혼수(婚需)
사성을 받으면 혼수감을 준비하여 신부의 집에서는 혼례의 날짜와 시간을 가려서 신랑댁에 보내는 것이 상례이다. 이를 흔히 '날받이'라고 한다. 날받이는 신부측의 혼주가 사주를 잘 보는 사람이나 한학에 밝은 이에게 부탁하여 받는데, 기본적으로 부모의 결혼달을 피하며 불가피한 경우에는 날짜만 피한다. 날받이는 신랑과 신부의 사주를 가리고 방위(方位)로 보아 '살이 없는 날'로 가려서 받는다. 살이 있는 날 결혼을 하게 되면 부부사이에 '공방살'이 들거나 애기가 죽거나 집안 사람이 아프거나 화를 입는다고 한다. 날받이는 사성을 받은 다음에 얼마간 있다가 보내며, 사성을 받은 달 안에 보내서 달을 넘기지 않고 회신하는 것이 원칙이다.
날이 결정되면 한지에 존안년월일시(尊雁年月日時)를 적어 봉투에 넣어 중매장이나 하인에게 보낸다. 형식은 다음과 같다.
혼수란 혼인시 신랑이나 신부가 서로 주고받는 예물이나 살림을 말하며 경제적 능력과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르다. 혼기에 이른 딸을 둔 집에서는 미리 혼인에 대비하여 반상기를 비롯하여 이불솜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하여 혼인에 대비하며, 어머니가 시집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생활을 통하여 교육한다. 민간에서는 특별한 혼수를 준비하는 경우가 드물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니까 혼수를 준비하였지 그 이전에는 혼인에 임박하여 신랑집의 도움을 받아서 혼수를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혼수로서 필수적인 것은 이불과 요강, 그리고 신랑의 옷, 시부모의 인사옷 등이다.
장성지역에서 혼인시 혼수를 준비했던 관례를 보면 다음의 두 유형으로 알 수 있다.
첫째의 경우는 신부댁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며 반가(班家)의 경우 신부측에서 혼수의 대부분을 부담한다. 신부는 혼인이 결정되고 나면 여러 가지 혼수를 준비한다. 장성의 경우, 장롱과 경대, 그리고 반상기(飯床器) 일체를 준비하며 시부모(媤父母)를 위하여 이불과 요 각각 1채와 베개 2개를 준비하는데 이불 홑청은 명주베나 공단(貢緞)으로 하고 안베는 무명베를 쓰고 속에는 목화솜 그리고 아랫목 이불 1채와 베개를 만드는데 큰 이불은 홋청을 쪽물을 들인 무명베로 하거나 명주베 또는 가에 청색을 댄 진흥비단으로 만든다. 베개는 원왕침(鴛鴦枕) 1개를 비롯하여 5개 정도 준비하고 반짇고리와 방석도 준비한다. 또한 신랑의 양복 한벌, 한복 한벌을 준비하며 반지와 시계도 준비한다. 그리고 인사옷으로 시부모 옷 각 한벌, 동서 옷 각 한벌, 조카들과 기타 친척들에게도 인사옷을 해온다. 신부집이 부유하면 쌀뒤주나 기타 여러범위와 종류는 신부집의 경제능력에 따라 조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신랑은 신부에게 옷을 해주고 화장품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패물을 해주며, 결혼 후 따로 살림을 차릴 경우에는 주거할 집이나 방을 준비한다.
둘째, 신랑 측에서 혼수의 대부분을 부담하는 경우로, 신부집에 경제적으로 빈곤하여 혼비를 부담하기 힘든 경우이다. 이때는 신부댁에서 날받이를 보내면 신랑집에서는 이불솜을 위한 '미영'(목화)과 쌀, 이불감 등을 보낸다. 그리고 신부의 집이 극빈한 경우에는 혼사에 필요한 일체의 모든 것을 보낸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있었던 일반 민간에서는 신랑이 혼수의 상당부분을 부담하였으며 이것은 혼인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요건이 되기도 했다. 민간에서는 신부집이 가난한 경우 날받이가 오면 신랑측에서 즉시 이불을 만들기 위한 솜과 혼례를 치르기 위한 쌀을 보낸다. 민간의 가난한 총각들은 이 비용이 없으면 늦도록 장가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양반, 부자집에서는 일체의 혼수를 신부집에서 부담하였다.
(5) 납폐(納幣)
보통 혼례식 전날 혹은 당일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혼서와 채단(綵緞·禮緞)을 넣은 함을 보내는 의식을 납폐라 한다.
납폐서(혼서)는 간지가 없으면 창호지로 쓰는데 길이와 넓이는 1자 6치 정도이며, 피봉에는 다음과 같이 쓴다. 그리고 납폐서는 전전지(全剪紙)로 싸고 검은비단보로 싸 함에 넣는다.
함에는 네폭의 붉은 비단보를 깔고 채단을 양편에 넣은 다음 납폐서를 가운데 넣고 뚜껑을 덮고 자물쇠로 채워 큰 보로 싼다. 이때 채단의 청색 옷감은 청색지에 홍색 옷감은 홍색지에 싸서 넣고 그위에 문안 편지를 넣는다.
- 上 狀
○姓○○관 尊親執事 … 前面
○○官後人 ○○○拜 … 後面
簡面에는
○○後人 ○○○再拜
時維 仲春
尊體百福 僕之長子○○ 年旣長成 未有 伉려 伏蒙
令愛주室 玆有先人之禮 謹行納幣之義 不備 伏惟尊照 謹上伏
○○年 月 日
함은 함진아비가 납폐일시에 맞추어 신부집으로 가지고 간다. 함진아비는 아들이 많고 부부가 해로(偕老)한 남자를 뽑아 쓴다. 그러나 근년에는 신랑의 친구들이 함진아비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부집에서는 납폐일시에 마당이나 대청에 모란 병풍을 치고 자리를 깔며 붉은색 얼굴에 검정칠을 하고 함을 메고 가서 두부 팔러 왔으니 사라고 하면서 뜸을 약간 드린 후에 함을 상위에 놓으면 신부 어머니가 이를 받아 안방에 들고 가서, 신부 아버지나 어머니가 깔고 앉아 함속에 손을 넣어 채단을 골라내어 그 색깔을 본다. 청색이면 시집살이가 고되며 맏아들을 낳고, 홍색이면 시집살이가 쉬우나 첫딸을 낳는다는 점을 치기도 했다. 함진아비에게는 주찬과 노자, 여비를 주었다.
(6) 장가질
대례 즉 혼례를 치룰 당일 신랑이 신부집을 가는 것을 초행 또는 초행길이라고 하는데 장성에서는 이를 '장개질' 또는 '장가질'이라고 하며 '질차라 간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존안시(尊雁時)가 날받이에 이미 통보가 되어 있으므로 출발 때는 먼저 거리와 속도를 정확히 계산하여 시(時)에 맞게 출발한다
출발전에 신랑은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입고 큰방의 웃목에 상을 차리고 정화수를 떠 놓고 선영에 재배한 다음 집안 어른께 큰절을 올리고 장가질을 떠나거나 절을 하지 않고 떠나기도 한다.
길을 차려서 가는 행렬의 순서는 [신랑-상객-중방-하인]의 순서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나 지역에 따라 중방이 앞선 경우도 있다.
신랑은 단정한 옥색의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고 말이나 가마를 타는데 가마 타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마는 뚜껑이 있으나 문을 떼어낸 가마를 타며 신랑집의 형편에 따라 다르나 네 사람이 메는 가마를 타고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객(上客)은 신랑집을 대표하여 가는 사람으로 '상각' 또는 '웃손님'이라고 부르며 신랑의 조부모나 부친이 가며 주로 부친이 가되 백부 또는 숙부가 동행하는 경우가 많다.
중방은 '중방쟁이' 또는 '함쟁이'라고도 부르며 함을 짊어지고 간다. 마을 사람중 지체는 낮지만 다복하고 첫아들을 낳았으며 재기(才氣)가 있는 사람이 함을 진다.
신랑집의 형편에 따라 행렬 모두가 가마를 타고 가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신랑과 상객이 가마를 타거나 신랑만 가마를 탄다. 가마는 마을의 공동 가마를 세주고 빌어서 사용한다. 행렬 도중에 상여를 만나면 가마를 멈추고 신랑이 내려서 큰절로 재배한다.
(7) 친영(親迎)
결혼식을 초례(醮禮) 또는 친영이라 하는데 조선 중엽부터 반친근법(半親近法)이 성행하여 고례(古禮)와는 달리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혼례를 치렀다. 신랑이 신부집으로 장가 가는 것을 신행(新行)이라 하며 신행에는 신랑은 쌍일산(雙日傘)을 받고, 등총 두 쌍과 안부(雁夫: 기러기 아비-보통 함진아비가 맡음)를 앞세우고 가는데 하인배들이 뒤따르며, 신랑의 가까운 존속인 상객(上客)은 맨 뒤에 갔다. 기러기 아비는 살아 있는 기러기 대신 나무로 깎은 기러기를 안고 갔다. 또 후객으로 두세명이 동행하기도 했다. 또 신랑 일행이 신부 마을에 닿으면 사람이 나와서 영접하여 신부집을 지나지 않는 이웃집을 빌어 일행을 잠시 쉬게 한다.
신부집에서는 대청이나 마당에 차일을 치고 병풍을 세운 앞에 배석(拜席)과 대문에서 배석까지 행석(行席)을 낀 대례청을 마련하고, 대례청의 대례상(교배상·친영상)에는 촛불 2개, 소나무 꽂은 술병, 대나무 꽂은 술병, 청홍실을 감은 용떡 두 그릇, 팥 한 그릇, 쌀 한 그릇, 밤, 대추 그리고 보에 싼 암탉과 수탉을 양 쪽에서 사람이 들고 서 있는다. 그러면 신랑이 사모관대를 하고 가마를 타고 문안으로 들어오면 신부집의 찬인(贊引)에 의해 대례청으로 인도된다. 이때 마을 청소년들이 '재꾸러미'를 하여 잡귀를 쫓는다. 대례청 앞에서 가마에서 내려 쌓아 놓은 볏섬을 밟고 넘어 대례청 앞에 서는데, 그때 돗자리 밑에 도토리나 수수깡을 깔아서 넘어지게 장난도 한다. 이는 신랑의 침착성을 시험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이렇게 신랑이 신부측 하인, 또는 당골에 의해 대례상 위로 넘겨져서 신부의 어머니나 마을에서 팔자좋은 부인이 치마로 받는다.
함은 마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것을 사용하며 내용물은 예물, 혼서지, 사모관대, 원삼과 족두리 등이며 고추와 메주, 미영(목화), 미역 등을 넣는다. 예물은 주로 신부의 옷이며 패물을 담기도 한다. 혼서지는 한지에 먹으로 쓰며 내용양식은 전면 내용과 같다.
사모관대와 원삼, 족두리는 양가(兩家)의 합의에 따라 준비한다. 그리고 마을에 산고가 들었을 경우에는 미역을 넣는다. 고추는 첫아들을 낳으라는 의미이고 메주는 잡귀를 쫓기 위한 것이며 미영은 목화로 장수하기를 축원하는 의미로 담는다고 한다.
중방은 함을 건넨 다음 주점으로 돌아와 존안시에 맞춰 오리를 안고 신랑을 인도하여 대례청에 들어 간다.
신랑이 뚜껑을 벗긴 가마를 타고 예청으로 향하여 가면 마을 청년들이 길을 가로막고 탈선(脫扇)을 한다. 탈선의 내용은 문자풀이가 중심을 이루며 신랑이 지면 모선(毛扇)을 뺏기며 다음에 마을 청년들에게 한턱 내고 모선을 돌려 받는다.
신랑이 가마를 타고 신부집의 대문을 넘어서 예청에 도착하여 신랑의 인접이 읍(揖)을 하면 신랑이 답읍하고 가마에서 내려선다. 그리고 다시 인접이 읍을 하면 '노적가리'를 넘어서 대례청으로 들어 선다. 대례청은 다음과 같이 꾸민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그 위에 예상(禮床)을 차린다. 상 뒤에는 병풍을 치고 위에는 차일을 친다. 예상은 절구통 위에 '안반'을 올려 놓은 것으로 양쪽에 대나무와 소나무를 꽂고 상 위에 살아 있는 암·수탉과 무로 숭어를 깎아서 대추를 물려 놓으며, '미영씨'와 고추·팥·콩 등을 한지에 싸서 묶어 놓는다.
다음에는 홀기의 순서에 따라 예식이 진행된다. 홀기의 일반적 순서는 다음과 같다.
- 신랑하마공립(新郞下馬拱立) : 신랑이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서라는 뜻으로 신랑은 초례청 밖에 선다.
- 찬인읍(贊人揖) : 대반(對盤)이 초례청 안으로 신랑을 안내한다.
- 신랑답읍(新郞答揖) : 신랑이 읍하고 안으로 들어 온다. 이 때 대문 밖에 짚불을 놓고 신랑이 그 불을 넘어 들어오게 하기도 한다.
- 신랑취존안청(新郞就尊雁廳) : 신랑이 전안사 앞으로 간다.
- 북향궤(北向 ) : 신랑이 북향하여 배석에 꿇어 앉는다.
- 포안(抱雁) : 중방이 신랑에게 오리를 주면 신랑은 오리의 머리가 왼쪽으로 가도록 두 손으로 공손히 받든다.
- 안치어지(雁置於地) : 신랑이 전안상 앞에 북향으로 꿇어 앉아 오리를 전안상 위에 놓는다.
- 신랑면복(新郞傘伏) : 신랑이 일어선다.
- 재배(再拜) : 신랑이 약간 뒤로 물러서서 큰 절 두 번을 한다. 흔히 동내절이라고도 한다.(신랑이 재배하는 사이 나무기러기를 내실로 가져간다.)
- 신랑흥(新郞興) : 신랑이 재배를 마치고 일어선다.
- 신랑소퇴(新郞小退) : 신랑이 조금 뒤로 물러선다.(이상으로써 소례(小禮)<존안례(尊雁禮)>가 끝나고 이어 대례(大禮)가 진행된다.
- 신랑취초례청(新郞就醮禮廳) : 신랑이 초례청 동편자리로 돌아선다.
- 신랑동향립(新郞東向立) : 신랑이 대례상 동쪽에서 외면(外面)을 하고 선다.
- 신부출(新婦出) : 칠보단장을 하고 원삼족두리로 장식한 신부가 백주한삼(白紬汗衫)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양쪽에 인접의 부축을 받으며 깔아 놓은 백포(白布)를 밟고 나와 대례상 서쪽에 선다. 뺨에는 연지를 찍고 이마에는 곤지를 찍는다.
- 신랑정면(新郞正面) : 초례상을 사이에 두고 신랑은 동편 신부는 서편에 마주 선다.
- 신랑신부궤(新郞新婦 ) : 신랑 신부가 꿇어 앉는다.
- 관세집건( 洗執巾) : 신랑 신부가 손을 씻는 절차이지만 형식적으로 손을 씻는 척 하거나 손만 적셔줄 뿐이다.(이때 신랑의 손 씻을 물은 남쪽에, 신부의 손 씻을 물은 북쪽에 놓는다)
- 신랑신부흥(新郞新婦興) : 신랑 신부가 일어선다.
- 읍부취석(揖婦就席) : 신랑이 신부에게 약간 고개 숙여 읍하면 신부는 신랑을 마주 하고 선다.
- 신부재배(新婦再拜) : 신부가 신랑에게 큰 절을 두 번 한다.
- 신랑답일배(新郞答一拜) : 신랑이 큰 절을 한 번 한다.
- 신부우재배(新婦又再拜) : 신부가 큰 절을 두 번 한다.
- 신랑우답일배(新郞又答一拜) : 신랑이 큰 절을 한 번 한다.
- 신랑신부궤(新郞新婦 ) : 신랑신부가 제자리에 꿇어 앉는다(이상의 절차를 교배례라 한다. 교배례가 끝나면 이어 합근례가 이어진다.)
- 근배교환( 杯交換) : 인접이 상에 있는 표주박 잔에 술을 따라 신부 입에 잠깐 대었다 뗀다. 그 술잔을 신랑 인접에게 건네면 신랑 인접은 그 술잔을 받아 신랑에게 준다. 신랑은 그 술잔을 받아 술을 마신다. 신랑이 술을 마시고 나면 신랑 인접이 굵은 젓가락으로 대례상의 밤을 집어 신랑의 입에 넣어 주기도 한다. 이번에는 답례로 신랑 인접이 표주박 잔에 술을 따라 신랑 입에 잠깐 대었다 떼어 신부 인접에게 건넨다. 신부 인접이 그 술잔을 받아 신부에게 주면 신부는 약간 입에 대었다가 내린다.
- 대례필(大禮畢) : 이로써 혼례식이 모두 끝난다.
- 신랑신부각귀처소(新郞新婦各歸處所) : 신랑 신부가 제자리로 돌아간다.
현재 장성지역에서는 향교, 서원, 문화회관, 학교 강당에서 현대적으로 변용된 전통혼례식이 거행되는데, 여기에서 사용하는 홀기(笏記)는 다음과 같다.
- 신랑출쌍촉전도(新郞出雙燭前導) : 신랑이 입장하고 쌍초롱을 든 사람이 앞을 인도한다.
- 집안자역거기차(執雁者亦居其次) : 목안을 든 사람이 또한 그 뒤를 따른다.
- 지여가집안입우소퇴(至女家執雁입右小退) : 신랑이 대기실 앞에 당도하면 목안을 든 사람이 오른쪽으로 물러서 앉는다.
- 주인출문서향읍(主人出門西向揖) : 주인이 신랑 앞에서 들어오도록 읍을 한다.
- 집안자진수우신랑신부집안좌수(執雁者進授于新郞新婦執雁左首) : 목안을 든 사람이 신랑에게 목안을 주면 신랑은 목안의 머리가 왼쪽에 가도록 받는다.
- 주인승자동계서향신랑승자서계북향궤(主人升自東階西向立新郞升自西階北向 ) : 주인이 동쪽으로 올라 서쪽으로 보고 서면 신랑이 서쪽 계단으로 올라간다.
- 치안우지(置雁于地) : 신랑이 전안상 앞에 목안을 내려놓는다.
- 주인시자수신랑면복흥재배(主人侍者受新郞傘伏興再拜) : 주인이 받으면 신랑은 절을 두 번 한다
- 모봉여출중문(姆奉女出中門) : 두 여인이 신부의 좌우 팔을 부축하여 나온다.
- 신랑집항자서계이출(新郞執降者西階而出) :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는 읍을 하고 계단 아래로 내려 온다
- 신부종지신랑도입(新婦從之新郞導入) : 신부는 뒤를 따라 가고 신랑은 대례상 쪽으로 인도해 들어간다
- 행교재례(行交拜禮) : 다음부터는 교배례를 행한다
- 신랑종자포신부석우서방(新郞從者布新婦席于西方) : 신랑측 사람이 서쪽에다 신부 자리를 깔아 놓는다.
- 신랑관우남신부종자옥지진열(新郞 于南新婦從者沃之進悅) : 신랑이 남쪽 대야에 손을 씻고 나면 신부측 사람이 수건을 내어준다.
- 신랑읍신랑신부구취석상향립(新郞揖新郞新婦俱就席相向立) : 신랑이 신부에게 읍하면 각각 자리로 돌아가서 마주 보고 선다.
- 신부재배(新婦再拜) : 신부가 두 번 절을 한다.
- 신랑답일배(新郞答一拜) : 신랑이 한 번 답례를 한다.
- 신부재배(新婦再拜) : 신부가 절을 두 번 한다.
- 신랑답일배(新郞答一拜) : 신랑이 다시 답례를 한 번 한다.
- 신랑읍신랑신부구취좌(新郞揖新郞新婦俱就坐) : 신랑이 신부에게 읍하면 각각 자리에 앉는다.
- 신랑짐주설찬(從者斟酒設饌) : 거드는 사람이 술을 따르고 찬을 차린다.
- 신랑신부각제주거효(新郞新婦各祭酒擧 ) : 신랑 신부는 각기 술을 모사에 비우고 안주를 조금 상위에 놓는다.
- 짐주(斟酒) : 술을 따른다.
- 신랑신부거음불제무효(新郞新婦擧飮不祭無 ) : 신랑 신부가 각각 술을 조금씩 들되 땅에 붓지 않고 안주도 먹지 않는다.
- 종자우취효배분치신랑신부지전(從者又取 杯分置新郞新婦之前) : 거드는 사람이 표주박 잔을 신랑 앞에 나누어 놓는다.
- 신랑신부흥신랑출취타실예필(新郞新婦興新郞出就他室禮畢) : 신랑 신부가 일어선다.
이로써 혼례식이 모두 끝난다.
예식이 끝나면 신부가 먼저 큰방으로 들어가고 다음에 신랑이 들어가는데 이 때 신랑은 마을에 산고가 든 경우 마루에 마련된 미역국밥을 세 번 떠먹고 들어가며 도중에 콩과 팥을 뿌려주고 미영씨를 품어 넣어 준다. 큰방은 병풍을 사이로 하여 신랑과 신부가 갈라져 있으며 각기 예복을 벗고 새옷으로 갈아 입는다.
상객이 돌아갈 때는 신부는 예복을 갖추고 절을 한 후 예복을 벗고 마당까지 나와서 반절로 전송한다. (박내경)(장성군청에서전문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