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석(立石)이야기
입석(立石)이야기
정월이나 대보름날이면 할아버지 당산나무와 할머니 당산나무를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풍물을 치고 집집을 돌며 지신밟기를 했을 선돌(입석)이 마을 입구에 세월을 이야기 하듯 서 있다. 마을 입구에 세워져 주민들의 단합과 농경문화의 주인공인 입석이 고리봉 입구 방촌마을에 있었는데, 요즘 말로 "마을 공동체적인 문화유산" 으로 불러야 할 유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돌이 많은 동네라서 보존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마을의 가구수가 140호를 넘는 큰 동네에서 마을의 평화와 안녕과 넓은 들판의 농경지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강력한 공동체적인 구심점 역활을 했다. 입석은 마을의 경계를 나타내기도 했고 보통 1~3m정도의 잔돌을 쌓고 그림과 같이 선돌을 중앙에 세우거나 남근석을 만들어 세우기도 했는데 우리 민족의 거석문화에 얽긴 민속신앙적인(종교)것이 입석이다. 동네 사람 중에는 혹시 누가 볼까 쉬쉬하면서 소원도 무수하게 빌었을 것이고 때로는 좋은 일이 있어 질펀하게막걸리를 원 없이 마시기도 했을 입석이 일제 강점기에도 5.16군사혁명 이후 몇 십년을 견디고도 오늘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기념비적인 유적의 입석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여기에서 공동체적인 문화의 중심에 거석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입석은 한반도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으로 보통은 마을 입구에 그림처럼 1m에서 3m 가량의 높이를 갖는 큰 돌을 세워 눈에 띄게 하는 기념물이다. 지역에 따라서 성인의 키 보다 큰 입석에서 무릎도 안되고 왜소해 보이는 입석도 있으나 대부분은 마을의 구심적 역활을 하는 정신적지주로 신앙적인 의미의 입석이 대부분이나 때로는 괸돌(支石)이라는 분묘(墳墓)인 경우도 있으며, 산 정상의 선돌 모두가 입석이 된 광주 무등산의 입석대도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입석은 신앙 또는 의식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일제시대 강점기 때에는 마을 주민들을 자유롭게 통치하기 위해 입석에서 신앙적과 의식적으로 행하던 모든 행동을 못하도록 했으며, 박정희대통령 집권 당시에도 일본처럼 철저하게 통제하였다. 일본이나 박정희대통령의 집권시절에 이처럼 입석에서 행하여지던 민속신앙활동이나 민속적인 의식활동을 통제한 이유는 단 하나 구심점을 없애 단결하지 못하도록 하여 쉽게 통제하는데 있었으며 줄다리기와 같은 전통의 놀이도 통제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민족은 농경문화 속에서 한 해의 농사를 끝내고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농사를 무사하게 짓게해준 하늘에 감사하고 조상에게 제사드리고 마을사람들과 떡과 술을 나누며 강력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근간으로 입석과 당산나무에 제사 지내는 전통적인 의식을 신앙적으로 행하였다. 지금도 마을 앞에 당숲(당산나무)이 있고 입석이 남아있는 마을을 흔하게 볼 수가 있는 것도 농촌마을이나 산간, 어촌에서 쉽게 볼 수가 있으나 도심에서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도 많다. 지금은 정월대보름 날이되면 전국의 곳곳에서 전통을 이어간다는 명목으로 의식이 행하여지고 있지만 옛날처럼 신앙적인 의미나 공동체적 구심점으로 가 아닌 전통의 맥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입석이나 당산숲(나무)에서 제사를 지낸다. 입석을 단순한 돌덩어리로 보지말고 ""마을 공동체적인 문화유산"으로 불러러야 할 문화유적이 아닌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