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영정 이야기
기영정 이야기
기영정은 전남 문화제 99호로 장성군 삼계면 사창리에 있으며, 광주에서 가는 길은 지방도로 816번을 이용하여 임곡을 거쳐 영광군 대마면으로 이어지는 고성산 아래에 있으며, 쉽게 찾는 법은 상무대을 찾아가면 길목에 안내판이 잘 설치되어 찾아가기가 쉽다.
삼계면 사창리에서 구 도로를 타고 5분 쯤 가다보면 관수정의 안내판이 있고 사창리를 막 벗어나는 곳에서 왼쪽을 쳐다보면 나이를 엄청 많이 먹었을 것 같은 왕버들 나무를만날 수가 있으며 시선을 조금 멀리 100m 앞의 소나무 숲 속으로 보이는 정자가 기영정이며 그곳에서500m정도를 더 가면 관수정이 있고 관수정 너머 대마면으로 넘는 고갯마루에 고성산이 있다.
기영정(耆英亭)은 정면 2칸과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조선시대 중종 38년1543년에 용암천(지금은 농수로로 폭도 좁고 자연의 맛은 전혀없음) 윗쪽의 높은 소나무 숲에 1543년 당시 전라도관찰사 규암 송인수가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을 위해 중종의 명을 받아 골기와와 마루를 깐 대청으로 건립한 정자이다.
용암천 위로 경치가 아름다운 경승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규암 송인수가 전라관찰사로 부임하려고 할 때 중종이 그에게 명을 내려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퇴관하여 고향에 머무르고 있는 송흠을 방문하여 중종 자신의 상회심(相懷心)을 전하고 또 동시에 그의 별업을 기영정이라 이름하도록 하는 소제기(所製記)를 전하도록 한 바, 송규암이 그 명을 받들어 부임하자 곧 12수와 함께 송흠을 방문하여 별업을 정자로 건립하여 주었다는 내력을 가지고 있다.
그후 시간이 지나고 병난과 화재를 당하여 폐허가 되었는데 다시 송규암의 10세 손인 송겸수(宋謙洙)가 영광군수로 부임하면서 철종 7년(1856년)에 이를 중건하였다.
낮은 외벌대의 돌 기단 위에 큰 덤벙 주춧돌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에는 각을 죽인 보아지와 주두를 놓고 굵은 대들보를 얹었다.
대들보 위에는 장혀받침 굴도리를 두어 서까래를 받치고 있으며 내부 가구 구조는 평5량가로 대들보 위에 낮은 부재를 놓고 충량을 통부재로 걸쳐 도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종량 위에는 다시 종량을 두어 장혀받침 종도리와 판대공을 얹어 가구를 구성하고 있다.
방이 없는 누정으로 벽이 없이 개방되어 있고 낮은 평난간을 돌렸다.(장성군청에서 발췌)
송흠의 호 관수정이라 함은 "맑은 물을 보고 나쁜 마음을 씻는다"는 뜻에 의한 것으로 천방사와 용암천을 낀 아름다운 경치를 가지고 있는 곳에 송흠이 지은 관수정이 길 건너 내계리에 있다.
송흠은 1459년(세조 5년)에 나서 1547년(명종 2년) 89세로 사망하였는데, 연산군 때 퇴직하여 후진교육에 전심했고 중종반정후에는 복직하여 내외의 여러 요직을 거쳤다.
특히 담양부사, 전주부사, 광주목사 , 나주목사, 전라도관찰사 등 외직을 봉직하였는데 이것은 101세를 산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
1538년(중종 38년)에는 청백리에 녹선되기도 했고 이때 효헌이란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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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행하는 모든 근원은 충·효 이외에서 구할 수 없으니 진실한 사람됨은 충효가 자기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일상 생활을 하는데 윗사람을 섬기고, 백성을 통치하는 자는 충효가 아니고는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윗글은 원래 천성이 정직하여, 거짓이 없고, 충·효를 겸비한 송흠 선생의 가훈이었다.
"근면 절약하며, 재물에 욕심을 부리지 아니하고, 백성을 통치한다면, 백성이 나를 따를 것이다." 이 말 또한 평소 선생이 즐겨 쓰시던 말씀이었다.
이처럼 송흠 선생은 청렴 결백하였으며 백성을 위한 올바른 정치를 하였으므로 다섯 번이나 청백리 포상을 임금님으로부터 받았던 분이다.
그는 1459년 이 고장 삼계면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3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발을 들여 놓았으나,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벼슬을 그만 두고 3년간 정성으로 상례를 지냈으며, 전라도 관찰사(지금의 도지사)를 지낼 때, 어머니 정씨 부인의 나이가 98세의 고령이었으므로 선생은 이제 고향에 돌아가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코자 벼슬을 사양할 것을 임금님께 간청하였던 바, 쾌히 승낙을 하여 고향에 돌아와 늙으신 어머니를 위해 3년간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를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의 지극한 효성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벼슬을 하는 동안 재물을 탐내지 않고 모든일을 공평하게 처리함으로써 청백한 관리로 이름났으며, 다른 고을로 부임 할 때는 말 세필로 충분했다고 한다.
세필의 말은 선생이 타는 말과 어머니와 부인이 타고 가는 말이었으나 조금도 재물을 탐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선생은 삼마(三馬)태수라고 불리여 지고 있다.
송흠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그의 훌륭한 인격과 청백한 관리 생활에 존경의 뜻을 품었던 이름난 분들이 그를 위해 시를 지여 이별의 선물을 하기도 하였으며, 향리로 돌아온 뒤에도 임금께서는 송흠의 청백한 생활과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종종 안부를 묻기도 하였다 한다.
송흠은 신평인으로 세종 5년(1459) 3월 13일 삼계 주산리 정각에서 송가원과 하동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송흠이 어렸을 때 정각에서 지내다 공부를 위해 삼서 생동의 봉씨 집에서 수학하였는데 한 달에 한번씩 정각에 계시는 어머니를 뵈러 왔다고 한다.
어느날 송흠이 어머니가 보고 싶어 한달을 채우지 못하고 보름만에 정각에 오자 어머니는 화를 내며 밤인데도 생동으로 쫓아 보냈다고 한다.
쫓겨난 송흠이 생동에 돌아와 보니 만곡사 아들 집 대문이 잠겨져 있어 대문 옆에서 쪼그리고 잠이 들었다.
그날밤 만곡사 아들이 꿈을 꾸었는데 대문 옆에 청룡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가 잠에서 깨어 하인들을 시켜 대문을 살피도록 했으나 살피고 온 하인들이 대문옆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하자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똑같은 꿈을 꾸자 이상해 여긴 그가 다시 대문을 살피도록 해 대문을 열어보니 송흠이 대문밖에서 쪼그리고 앉아 잠이 들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꿈의 용이 바로 송흠이라 믿었고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을 예감하였다.
송흠은 역시 성종 11년(1480) 21세때 사마시에 함격했고, 성종 22년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정자(정9품)로 첫 관직을 시작하여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근면절약하고 청렴결백하여 청백리 표상을 5회 수상하였고 학문에도 뛰어났고 시에도 능하여 망동서실 사제 김정국과의 회답시를 비롯하여 관수정 원운 및 기에서 그의 재능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문인 가운데는 송순과 같은 시가의 거성을 배출되기도 하였다.
그의 투철한 충효사상은 관직생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부모를 위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수없이 하였다.(장성군청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