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수서원과 포충사가 있는 모산리(한천면)
죽수서원과 포충사가 있는 모산리
죽수서원과 포충사는 한천면 모산리(牟山里)에 있는데 모산(牟山)마을의 모(牟)자와 도산(道山) 마을의산(山)자를 각각 취여 모산리라 명명되었으며 현재 모산마을((牟山,갯마을,개몰)과 도산마을(2리)로 나뉘어 있다.
모산마을은 처음에 쏘터였는데 차츰 토사가 쌓여 그 위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지석천에 바닷물이 들어올때 바닷가라는 뜻으로 갯마을이라 불렀다.
이 갯마을은 이후 「갯마을〈갯몰〈개몰〈개머리」로 변천 과정을 겪게 되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이 마을을 개몰이라 부르고 갯마을이었던 증거로는 마을에서 우물을 파거나 땅을 깊이파면 개펄과 검게 썩어가는 나무조각이 출토된 바 있다.
개몰로 불리우면서 풍수지리설이 도입되었는데 마을형국이 개가 두마리가 엎져있는 형국이어서 개머리라 하였다고 전하고 마을을 세분하면 우데미, 아래데미로 구분된다.
1593년 安邦俊(1573∼1654)선생이 이 고을에 와서 마을형태가 소가 누워있는 형국같다하여 모산리라 칭하였다고 전해오는데 모산의 뜻은 쏘가 있는 산 아래의 의미에서 출발하여 쏘메라 부르다 이를 한자화하여 소울모(牟)자와 뫼산(山)자를 차용하여 모산(牟山)이라 표기하였다.
모산마을은 매봉을 뒷산으로 하고 동쪽으로 황새봉, 북쪽으로 노적봉이 있으며 서쪽으로 충신강(지석천)이 남에서 북쪽방향으로 흐르며 남쪽에는 금전저수지에서 흘러오는 내가 동에서 서로 흘러 지석천으로 유입되고 마을 뒷산 너머에는 천일대와 죽수서원, 그리고 포충사가 자리잡고 있다.
국도 제29호선이 서쪽 능주면에서 한천교를 건너 마을 앞을 지나 모산교를 건너 남쪽으로 도산마을로 이어지며 지방도 제822호선은 서쪽 능주면에서 한천교를 건너 마을 앞을 지나 동쪽 금전리로 이어져 있다.
주요 유물유적으로는 죽수서원(竹樹書院), 포충사(褒忠祠), 천일대(天日臺)(죽수서원 옆에 있는 바위로 監司 朴承宗명명) 가 있다.
죽수서원(竹樹書院)
가. 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산15-3번지
나. 연 혁 : 죽수서원은 賜額서원으로서 靜庵 趙光祖(1482-1519)와 學圃 梁彭孫(1488-1545)을 배향한 유서깊은 서원이다. 순천의 玉川書院(金宏弼 배향, 1568년사액)에 이어 전남지방에서 두번째로 선조 3년(1570)에 사액된 서원으로, 시초는 능주에 유배 賜死된 정암을 享祠하기 위해 학포의 주선으로 화순군 이양면 증리 중조산아래의 茅屋에서 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암 조광조는 주지한데로 중종대 道學政治를 주장하다가 훈구파의 己卯士禍에 被禍되어 능주에 유배되었는데 이때 정암과 함께 생원시, 현량과에 같이 뽑여 유별한 사이 이었던 학포 양팽손도 삭탈관직 당하고 향리 능주로 낙향, 유배온 정암과 조석으로 대하고 서로 강론하면서 돈독히 교환하고 있었던 처지이었다.
조광조가 사사되자 위와같은 인연이 있는 양팽손은 정암의 시신을 거두어 화순군 이양면 쌍봉사 주위에 장사지내고 인근 中條山 아래에 모옥을 지어 문도들에게 춘추로 향사하도록 하기에 이르렀는데 당시 義理가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선조가 즉위한 이듬해(1568)에 정국이 바뀌어 조광조가 영의정에 추증되고 이어 文正이란 시호가 내리자 조정에서는 정암을 향사할 서원건립이 논의되었다. 2년 뒤인 선조 3년(1570)에 당시 능주목사 趙時中의 주선으로 학포때의 모옥을 옮겨 현재의 서원위치인 한천면 모산리 天日臺 아래에 서원을 새로 짓고 동시에 竹樹라는 賜額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능주사림 文弘獻은 사우의 터를 제공하고 家奴婢를 제공했다는 기록이 있다.(敬庵先生實記, 行狀, 李東彬撰, 1675)
이렇게 설립된 죽수서원은 물론 조광조를 향사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후 1613년(광해군 5)에는 남평현감 趙維韓, 영암군수 趙纘韓 형제의 협조로 중수한 바 있다. 1630년(인조 8)에는 향내사림과 조정에서 沙溪 金長生 등의 발의로 이 서원에 앞서 언급한 학포 양팽손을 配享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죽수서원이 창건된지 80년이 지난 1650년(효종 원년)에 경기도 용인에 조광조를 향사하기 위한 深谷書院이 세워졌다.
1869년 대원군의 서원철훼시 이 심곡서원은 보존되고 먼저 세워진 죽수서원은 철훼를 당하게 되어 1871년에 사우가 헐리자 능주 유림들은 애석함을 삭이고 서원터에 壇만 마련한채 제향을 이어오고 있었다.
해방을 맞이하자 능주유림과 후손 들이 이 서원을 복구하기 위해 제주양씨가 많이 사는 도곡면 월곡리로 이건할 것을 결의하여 도유사 梁會仁 등의 노력으로 1971년에 월곡리에 사우를 준공하여 죽수서원의 명맥을 잇고 있었다. 그 후 근자 1983년에는 정암의 후손 趙國朝 등이 중심이 되어 본래의 牟山里 옛 터에 다시 이전하여 새롭게 서원을 건립하고 옛모습을 되찾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모산리에 새로 重創된 죽수서원은 1986년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0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다. 배향인물
1) 趙光祖(1842-1519) : 자는 孝直이며 호는 靜庵이요 시호는 文正이다. 본관은 한양으로 개국공신 溫의 5세손이며 감찰 元綱의 아들로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 났다. 일찍이 학문에 뜻이 컸으며 18세때 아버지의 임지에 따라갔다가 마침 熙川에 유배된 寒暄堂 金宏弼을 찾아 문하에 들었다. 성리학에 침잠하여 학행이 널이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얼마후 스승 김굉필이 갑자사화에 희생됨에 큰 자극을 받았다.
1510년(중종 5)에 진사시에 장원, 5년뒤 알성시에 급제하였다. 전적을 거쳐 사헌부 감찰, 홍문관 부제학 등의 淸職을 역임하였는데 부제학 재임때 소격서등의 혁파를 주장하여 실행을 보았고 中宗의 신임을 받았다.
대사헌 재임시 그가 주장한 현량과의 실행을 보아 金湜 등 28명의 신진사류 들이 대거 선발되자 그들을 홍문관 사간원 등 청한요직에 등용케하여 훈구간신들을 축출하고 성리학의 근본이념에 입각한 도학정치, 哲人君主주의를 실행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국왕에 대한 경연에 열성이었고 정몽주, 김굉필 등을 文廟에 종사할 것과 성삼문 등 사육신의 贈褒를 요구하였다. 특히 중종반정 때 靖國功臣의 僞勳을 깎아 내리려 하자 훈구파 洪景舟 南袞 등이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들이 당파를 조직, 조정을 문란케 한다는 무고로 중종을 움직여 마침내 기묘사화가 야기되자 일군의 신진사류 들과 함께 곧 바로 피화, 영의정 鄭光弼 등의 옹호가 있었으나 능주로 유배되어 35일 만에 사사당하였다.
1568년(선조 1)에 신원되고 영의정에 추증, 시호는 문정으로 내리었으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율곡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을 東方四賢이라 하여 숭배하였다. 조선중기 도학정치로서 개혁을 과격하게 시도하였던 조광조는 훈구보수세력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치이념을 철두철미 실행하려고 했던 철인정치가로 회자되고 있다. 능주의 죽수서원, 양주의 道峯書院, 희천의 兩賢祠, 용인의 深谷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2) 梁彭孫(1488-1545) : 자는 大春, 호는 學圃, 본관은 제주이며 以何의 아들로 능성현 출신이다. 13세에 知止堂 宋欽의 문하에 들어가 宋純 등과 함께 수확하였고 총명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1510년(중종 5)에 조광조와 함께 생원시에 뽑히고 1516년(중종 11)에 式年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여 正言으로 出仕한 후 조광조와 함께 賜暇讀書를 하기도 했다.
1519년(중종 14)에 홍문관 교리로 재임할 때 조광조의 위훈삭제사건과 함께 기묘사화가 터지자 이를 강력히 항소하였다. 이 기묘사화 때에 훈구파의 파직상소로 양팽손도 역시 관직을 삭탈당하고 향리인 능주로 낙향하였다. 유배온 조광조와 능주에서 다시 상면, 잠시나마 신고를 같이하고 학문적 교유를 가지었으나 조광조가 1개월여만에 사사당하자 그 죽음을 홀로 지키고 친히 염습하여 능주 인근 쌍봉사 부근에 장사지내고 茅屋을 지어 문인에게 춘추로 제향하도록 하였다.
1537년(중종 32) 반대파 金安老가 죽은 뒤 복직되어 1544년(중종 39)에 龍潭현감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이상과 같은 학포의 학문과 의리가 귀감이 되어 인조 때에 판서로 추증되고 시호는 惠康으로 내려 졌다. 1630년(인조 8)에 사계 김장생 등의 건의로 죽수서원에 조광조와 함께 배향되었다.
라. 유적현황
죽수서원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원군의 철훼령으로 당초의 한천면 모산리 서원이 폐원되자 근년 1971년에 도곡면 월곡리로 이설되었다가 1986년에 다시 모산리 본래 장소로 이전 복원되는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능주면 소재지에서 동쪽 2㎞ 정도 들어가면 한천면 모산리 일대가 나타나는데 연주산 아래의 그윽한 곳에 서원이 위치하고 입구쪽에서 전면 우측으로는 멀리 능주고을이 내려다보여 정암선생의 영혼이 넘나 드는 듯한 곳이며 서원 우측에는 褒忠祠와 인근에 天一寺가 자리하여 주변의 분위기가 자못 엄숙하다.
서원은 연주산의 하록 경사면 대지 357평에 남북방향으로 외삼문 동재 강당 내삼문 사당 순의 종축으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경내는 호박돌 담장으로 깨끗이 꾸며져 있다. 내삼문으로 올라간 계단이 길고 좀 경사가 심하나 아래 뜰의 강학구역인 동재, 강당과 윗 제향구역인 사당이 오히려 확연히 구분되는 분위기로 前學後廟의 배치형태이다. 사당은 8.7평, 강당 10.5평, 동재 12.6평, 내삼문 3.1평, 외삼문 5.6평의 건평으로 각기 지어졌다. 경내 담장 안쪽에 죽수서원유지추모비가 자리하고 있어 고색창연하게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祠堂은 정면3간의 맞배집 양식이며 전후에 退를 두었으나 전퇴는 개방하여 제향시에 편리한 공간을 두었으며 처마는 전후면 겹처마로 양 박공면에 風板을 달았다. 초석은 60㎝의 원형장초석이며 원통형 두리기둥 위에 柱頭를 얹고 昌枋을 걸었으며 3翼工 형식의 拱包에 蓮봉이 草刻되어 있다. 가구는 1高柱5樑架로 굴도리를 걸었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내부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창호는 정면 3간 모두 쌍여닫이 띠살문을 달았다.
講堂은 정면3간, 측면2간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어졌다. 내부는 모두 우물마루를 깐 通間으로 講學을 위한 공간이다. 원형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고 창방과 柱心道里 長舌사이에 柱間마다 동물형상의 花盤을 배치하였다. 2익공식의 공포이며 보머리에는 鷄頭형상이 조각되어있다. 架構는 5梁架이며 굴도리를 사용하였고 천정은 연등천장이다.
東齋는 정면3간, 측면1간반의 팔작집이며 전면 반간은 툇마루를 설치하여 생활공간을 넓히었고 방은 모두 온돌방이다. 두리기둥을 세운 굴도리집으로 1高柱5梁架로 架構되었다.
內三門은 사당에 들어가는 문으로 정면3간, 측면2간의 맞배집이며 처마는 전후 모두 겹처마로 양 박공면에 풍판을 달았다. 막돌초석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2익공식의 공포이나 그 끝부분이 서로 붙어있는 상당히 변형된 모습이다.
外三門은 서원의 主出入 대문으로 정면 3간, 측면1간의 맞배 솟을삼문이다. 중앙간만 통로로 사용하고 양협간은 전면이 벽체로 되었다. 막돌초석위에 중앙간의 기둥만 두리기둥을 세우고 양측은 方柱를 세운 3량가의 구조로 전통적인 솟을 대문형식과는 양식이 변형되어 있다.
마. 관련유적
1)靜庵謫廬址
조광조가 능주에 유배되어 살았던 집은 당시 官奴 文厚從의 초가 3간 집이었다고 하는데 현재 능주면 남정리 174번지 일대이다. 현재 이 초가를 복원하여 1979년 8월 3일에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41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이 적려지 초가 옆에는 조광조의 영정각과 강당도 새로 지어져 적려경내를 새로 단장하였다.
2)竹樹書院遺址追慕碑
죽수서원이 사액서원이지만 대원군 때에 철훼된 것은 조광조의 고향인 경기도 용인의 심곡서원과 겹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어떻든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훼령 이후에 죽수서원이 철훼되자 그 서원유지에 추모비를 세웠다. 梁在慶의 주선으로 비문은 崔益鉉이 짓고 陰記는 宋秉珣이 썼다.
포충사(褒忠祠)
가. 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산 15번지
나. 연 혁 :
포충사는 임진왜란 때 용전분투, 진주성 전투에서 장열히 순절한 崔慶會 선생을 主壁으로 제향한 賜額祠宇이나 대원군때의 철폐령으로 철훼된 후 褒忠祠遺墟碑(1868)가 대표유물이며 근자에 세워진 유물각(1984)이 명맥을 잇고 있다. 포충사가 처음 건립된 시기는 1605년(선조 38 : 列邑院宇事蹟), 1609년(광해군 1 : 書院可攷), 1609년(광해군 1 : 文獻備考) 등 차이가 있게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년대를 고증하기 어려우나 일부에서 서원가고의 기록대로 광해군 1년으로 보고 있는듯 하다.
사액의 년대도 차이가 있어 서원가고에는 1609년으로, 문헌비고는 1611년으로 六義錄및 日休堂集(해주최씨문중발행)에는 天啓年間(인조시대) 1627년(인조 5)으로 각각 보고있어 그 시기를 정확히 가리기 어렵다. 다만 일부에서는 최경회의 사우가 같은 임란공신 사우인 高敬命의 褒忠祠(1603년 사액)와 金千鎰의 旌烈祠(1607년 사액)보다도 약간 늦은 시기에 건립되고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1609년을 사우건립 년대로 보고 사액은 1611년 정도가 아니겠느냐는 견해가 있다. (전남의 서원사우, 이해준술, 목포대학박물관, 1988, p.218)
어떻든 모산리 죽수서원 곁에 최경회의 사당이 세워진 것을 계기로 金慶遇가 사액을 청하는 청액소를 올렸고 이에 따라 곧 恩額을 입었다는 것으로 보아 위의 1609년 건립년대가 참고될만 하다.
1630년(인조 8)에는 李貴의 啓請(1624)에 따라 임진왜란 때 최경회와 함께 순절했던 文弘獻(? -1593)을 배향하였고 1655년(효종6)에는 도내유림의 발의로 을묘왜란(1555)때 달량진에서 순절한 曺顯(1535-1555)을 추배하였다. 1860년(철종 11)에는 역시 최경회와 함께 전사한 具喜(1553-1593)를 추배하려 하였으나 얼마후 서원철훼령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때 향유 文泗休, 閔翼邦 등 35인이 追配를 건의하였다.
포충사도 대원군때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設壇祭享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일제시 1923년에는 추배를 이루지 못한 具喜를 설단하여 제향하였고 해방후 1967년에는 吳邦翰(1574-1594)을 또한 추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 배향인물
1) 崔慶會(1532-1593) : 자는 善遇, 호는 日休堂 또는 三溪, 본관은 해주, 天符의 아들로 화순 삼천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가학과 松川 梁應鼎, 高峯 奇大升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568년(선조 1) 에 문과에 급제한 후 전적, 감찰,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옥과, 장수, 무장의 현감과 영해부사, 영암군수, 담양부사 등의 외직을 두루 거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친상중임에도 불구하고 형 慶雲, 慶長과 함께 향리에서 의병을 규합하고 全羅右義兵將이 되어 금산, 무주, 창원, 성주 등지에서 왜병을 격퇴하여 공을 세웠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성전투(1차)에서는 대승하였으나 계사년 제2차 진주성 전투 때에 성의 함락으로 金千鎰, 黃進, 高從厚 등 의병장과 함께 장열하게 순절하였다. 의기 논개와의 일화는 유명한 것이었으며, 왜란이 끝난 후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1633년(인조 11)에 金在魯의 계청으로 忠毅公의 시호를 내리었다. 능주의 포충사와 진주의 彰烈祠에 제향되었다. 능주의 三忠閣(최경회, 조현, 문홍헌)에서도 기리고 있고 화순읍 다지리에 崔慶會祠堂(不○廟), 화순읍 다산에 三忠祠(최경운, 경장, 경회, 3형제 배향)등이 있으며 초혼묘는 한천면 금전리에 있다.
2)曺顯(1535-1555) : 자는 希慶, 호는 月軒, 본관은 창녕이며 節孝公 億의 아들로 능주에서 태어났다. 1552년(명종 7) 에 무과에 급제하고 을묘왜변때 달량진(현 해남 남창)의 權管으로 있으면서 도원수 李潤慶과 함께 왜적을 맞아 선전하였으며 달량진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왜변이 끝난 2년 후에 병조참의로 추증되었으며 선조 11년에는 조정에서 禮官(具忠淵)을 보내 제사케 하였고 1665년(현종 6)에 능주 포충사에 배향되었다. 1702년에는 능주유생 具三益의 상소로 旌閭를 받았다.(숙종실록 28년 4월조에의 구심익의 상소에는 曺世顯으로 기록되었다) 능주 삼충각에도 충절을 기려지고 있다.
3) 文弘獻(? -1593) : 자는 汝徵, 호는 慶庵, 본관은 남평이다. 李珥의 문인으로 1582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백명의 의병을 이끌고 고경명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군량미를 모으기 위해 동복에 머물고 있을때 고경명의 錦山패전 소식을 듣고 사돈인 최경회와 함께 화순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달려갔으며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성의 함락으로 순절하였다. 1675년(숙종 1)에 정려를 받았고 1691년(숙종 17)에 유학 尹瑜의 상소로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다.
4)具喜(1552-1592) : 자는 愼淑, 호는 淸溪, 본관은 綾城이다. 일찌기 고봉 기대승의 문하에 들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500명을 이끌고 고경명의 막하에 달려갔으며 이어 병사 최경회를 따라 진주성 전투에 참전, 동향의 文弘獻 등과 함께 용전하다가 성의 함락으로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1697년(숙종 23)에 정려되고 의정부찬성으로 추증되었다가 1860년(철종 11)에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이해에 포충사에 배향토록 되었으나 서원철폐령으로 배향되지 못하다가 1923년에 설단 배향되었다.
5) 吳邦翰(1574-1593) : 자는 元仲, 호는 尙義齋이다. 보성 朴光前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나 1590년(선조 23)에 무과에 급제하고 開雲萬戶, 부산첨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희, 문홍헌, 朴赫起 등과 倡義하여 계사년 진주성 전투에서 최경회의 막하로 분투하다가 순절하였다. 후일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근자 1967년 포충사 復設시 追配되었다.
라. 유적현황
모산리 죽수서원 우측에 위치하였던 포충사는 사액사우임에도 불구하고 고종 때 훼철된 후 유허비만 남긴 채 폐허화 되다시피 하였다. 근자 1984년에 포충사의 옛터 부근에 (유물관)을 세우고 여기에 최경회 등 5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유물관은 정면3간 측면3간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원형초석위에 도리기둥을 세우고 昌枋을 걸어 頭柱를 얹었다. 架構는 내부에도 기둥을 배치한 1고주5량가로 되었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이요 바닥은 전돌을 깔았다.
창호는 중앙에만 쌍여닫이 정자살문을 설치하였다. 입구 계단과 건물 및 경내가 잘 정비되어 있다.(자료의 출처는 화순군과 목포대학교 발행의 “능주목의 역사와 문화”를 참조하고 발췌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