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깔크막의 우리동네 이야기

우리동네 이야기 풍천대(안청공원)

깔크막 2009. 5. 18. 02:19

 안청동 안청공원(하남공단)에 있는 풍천대

 

 

 

 

 

 풍천대 정면 그림

 안청공원의 숲길

 하남공단( 안청공원  내)상징탑

 

 

항일의병 석음 박노술 선생
 

풍천대는 석음(石陰) 박노술(朴魯述 1851년 ~ 1917년)선생의 항일의적(抗日義蹟)을 기념하는 삼층석대

(三層石臺)이다.석음선생은 안청동(安淸洞)에서 태어나 노사(蘆沙) 기정진 선생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은 선비로 서기 1895년 을미사변때 송사(松沙)선생의 의병활동에 참여하였으며 당시에 많은 감동과 호응을 일으켰던 선생의 격서(檄書)가 존화록(尊華錄)과 석음유고 등에 전해온다.

서기 1905년의 강압적인 을사조약에 이어 서기1910년 경술년에 우리의 주권을 송두리째 빼앗은 합병조약을 강요하는 등 천인공로할 일제의 침략만행에 치를 떨었으며 거듭되는 조국의 비운을 비룡대(飛龍臺)에 올라 통곡하셨다.
참을 길 없는 울분과 비통함을 스스로 달래며 문인들 동지들과의 강론을 통하여 항일구국정신의 선양에 힘을 다했으며 일제(日帝)가 보내온 소위 은사금칙첩(恩賜金勅帖)을 단호하게 물리쳐버린 선생의 쾌거는 저들의 악랄하고도 끈질긴 침략의 마수 앞에 차츰 지쳐만가는 이 지역 대중들의 항일의식 속에 일대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선생에 대한 일본관헌의 탄압은 서기 1910년 11월부터 시작되었다. 비아병참소(飛鴉兵站所) 장성헌병대 광주경찰서 등에 누차 구인(拘引)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선생의 의지는 누구도 꺽지 못했다.
"天崩地陷 心不可變 國破身亡 義不可失""천지가 다 무너져도 나의 본심은 변할수 없으며 나라가 부서지고 이 한 목숨 죽는다 해도 조국에 대한 나의 의리는 흔들리지 않을 것" 이글은 장성헌병대에서 저들 앞에 써 던진 시구로서 그 즈음에 널리 전송되었던 것이다.
서기1917년 6월 광주경찰서에 구인 되어간 선생은 그 사흘만에 의식이 끊어진 몸으로 가마에 실려서 돌아와 그 길로 운명하셨다. 망국의 한을 품은 채 67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신 것이다.안청동 율리전사(安淸洞 栗里田舍)에서 운명하시기 한달 전에 아들 일규(日圭)에게 "마을앞산 비룡대 위에 조선 삼천리를 뜻하는 삼층석탑을 세우고 싶다는" 분부가 있었다.
목숨과도 바꿀수 없는 내 조국 삼천리강토가 외적에게 짓밟혀 일조에 생지옥이 되고 말았으나 오직 나라를 구하고 주권을 되찾을 우리의 애국정신만은 저 바윗돌처럼 굳세고 단단하고 변함이 없이 지켜나가야 한다는 깊고 깊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선생의 유지에 따라 문인 여러분과 아들 일규 및 친지들이 정성을 모아 서기 1920년 10월 풍천대(風泉臺)가 준공되었다.

※ 추기(追記) 상기 풍천대는 안청앞산 비룡대에 있었는데 1990년대 초 하남공단 건설로 공단 내 공원에 이전 중건(重建)하였음.

 


 
안청동의 유래

    본래 안청리는 광산구 거치면의 지역으로 개(?)가 있었는데, 그 안쪽이 되므로 안청이라 하였는디
    1914년 행정구역의 폐합에 따라 계량리, 신안리 일부와 장성군 남이면의 안청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안청리라 해서 하남면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안청리는 본시 동네 터가 와우형국인디 그래서 이 앞에 높은 산을 가마솥을 엎어 놓은 모습이다 해서
가마봉이라 하고 즉 소에게 쇠죽을 쑤어 먹게 한다는 것이재. 또 신안 저 우에 들어 가서 반각굴이라고
있는디 거그 가면 질이 아홉인께 아홉갈래라고 불러야 한디 그냥 와우갈래라 그러고 마을 맞은편 요 앞에
풍청대 세운디 쪼금 들어가면 원굴이란 데가 있는디 원굴이란디도 소가 밭을 간다치면 “ 워 ”한다 해서 원골이라 하재. 개안 남쪽 들을 감밭태 그러는디 소가 가는 밭이라 해가지고 밭갈경자 밭 전자 경전평이라고 한문으로는 쓴다 그래요. 어쨌든 이 마을은 소와 관련된 이름이 많은데, 누운 소는 옛날 흔히 현자가 은거한 모양을 비유했다 그런디 이곳에 외성당과 비룡대가 있어요. 외성당은 이조 중엽의 학자 안청공 박광준이란 분이 지었는데 지금은 그 타만 있고 다만 거기 은행나무 밑에 가서 이렇게 큰 돌이 남아있는디 그것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안청공을 뵐 올 때 그 돌에서 하마해 내리시고 돌아가실 때도 거기서 말을 타셨다 그래요. 그 안청공의 후손이 개안 남쪽에 있는 산 등성이, 거가 용이 하늘로 오르는 형국이라 해서 비룡등이라 한디 거시기 박 노나라 노자, 길 수자 그 양반이 호는 서금이신디 거기다가 바람 풍자 하늘 천자 풍천대를 세웠어요. 왜놈들이 처음에 선비들 한테 은사금이라고 돈을 줬는디 그 돈을 기어니 안받으시고 여러 번 경찰서에 잡혀가셨는데 그러시고나서 풍천대를 세우겠어. 풍천대라는 이름은 시전에 ‘ 비풍하천 ’이란 시가 있는데 거 옛 나라가 망한 것을 원통해 하며 지은 시인디 거기서 풍자와 천자를 따서 풍천대라 이름 짓고 조선이 망한 것을 원통이 여겨 출입을 삼가셨다 해요.
그런디 시전을 보면, ‘ 비풍하천 ’이란 말을 못찾것고 다만 ‘ 비풍 ’이라는 편명한 보았어여.
그래서 흑자는 풍천대가 계안 남쪽에 있는 용이 하늘로 오르는 형국이라 해서 비룡대라는 등성이에 있기 때문에 그 용이 ‘ 비풍어천 ’한다는 데서 풍천을 따서 이름지었다고도 해요. 그런게 용이 바람을 잡아타고 승천하는 것처럼 머지않아 우리 조선도 그랬으면 하는 마음으로 지섰는가 모르재. 어쨌든 해년마다 인근 선비들이 모여서 강독하고 제사를 지내고 그랬어요.(광산문화원 자료 전문)

 

 

 

계안마을의 유래
조선조 효종때 안청 박광후공이 정착개촌하면서 그 아호를 따 안청(安淸)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효종때 박광후공이 현 비아동사무소 관내 전일방송 송신소 북쪽에 살다가 넓은 농토를 찾아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문화유적: 효종때의 석학 박광후공이 세운 「畏省堂」터가 尙存하며 율리전사(栗里田舍) 「風泉臺」가 있어 石陰 朴魯述公의 유림제자 700명으로 구성된 문생계가 있었다 한다. (풍천대는 안청공원으로 옮겨졌음)


전설: 마을앞쪽에 「비룡대」라는 등성이가 있는데 용이 승천하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그곳에 수령의 백일홍이 있다. ( 하남공단으로 편입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음)